김동진 전 통영시장

▲김동진 전 통영시장.

 

본인은 제7대 통영시장에 취임하고서 두가지 해결해야 할 난제를 안고 시정을 출발하였다.

첫째는 세수입으로 보전되지 아니하였던 과잉세출집행으로 인한 590억원의 노출되지 아니한 빚이었고 둘째는 그 당시 설계가 막 끝난 520억원의 건축비가 소요되는 국제음악당을 어떻게 완공하고 매년 70~80억원을 소요되는 이 음악당을 어떻게 운용하느냐의 문제였다.

그 첫번째 문제는 기회가 주어지면 다음기회에 발생원인과 대처방안에 대해 기술하기로하고 금번 이 소고에서는 독일인 플로리안이 7녇동안 통영국제음악제단과 음악당의 대표(C.E.O.chief of excutive officer)로서 그 소임을 다하고 떠남에 있어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공공기관 수장으로 영임하게 된 경위와 본인과의 인연 그가 재임중 이룩한 업적 개인적인 소감 등을 기술코자 한다.

음악당 건립은 2008년부터 거론되어 2009년 520억원 규모로 현재의 위치에 건립한다는 설계안이 완성되었으나 구체적인 건축비 조달계획(막연히 국비50% 지방비 50%분당계획만 세워져있었음)과 경제성 확보가 결여되어 있었다.

이에 건축비는 그 당시 신임지사가 추진하였던 모자이크 사업에 포함시켜 도비 120억원을 확보하고 문화관광부차관을 면담하여 2년에 걸쳐 260억원의 국비를 확보함으로써 2013년 6월 역사적인 준공을 보게 되었다.

특히 소공연장(Black Box)는 경제성 확보를 위해 다양한 공연을 수용할 수 있도록 당초 설계보다 대폭 수정되었다.

객석 1300개와 최고수준의 음향시설을 갖춘 국내 네번째로 큰 음악당 준공에 즈음하여 인구 14만밖에 되지 않고 재정규모가 열악한 통영시의 입장에서 이를 어떻게 운용할지에 대한 고민과 시름이 깊어져 갈 때 당시 재단이사장이었던 이홍구 전 총리마저 사의를 표명하게 되어 더욱 난감한 처지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새로운 이사장을 영입코자 통영출신인사여부를 떠나 실업계 금융계 관계인사 등을 광범위하게 만나 영업활동에 나섰으나 어느누구도 재정조달의 어려움으로 선뜻 응하지 않았다. 주위에서 제정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시장이 맡는게 그 운용에 안정을 기할 수 있다해 본인이 이사장에 취임하였으나 여전히 어떻게 운용할지에 대하여는 그 해답을 찾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그당시 통영국제음악재단 사무국장이었던 김승근 교수(현 서울음대교수)와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하던 과정에서 아시아에서 음악회 각종 공연등을 가장 많이 경험해본 홍콩아트페스티벌(Art festival)의 총감독(Excutive Director of H.K.Festival) 티사 호(Tisa Ho)를 만나보라고 하여 그 즉시 홍콩을 달려가서 티사 호를 만나보게 되었다.

진지하게 나의 고민을 털어놨다. 통영이 금세기 5대 현대음악 작곡가인 윤이상의 고향임을 언급 하면서 재정지원은 책임질 테니 현대음악(contemporary music)에 관한 한 아시아에서는 그 메카로 만들고 싶다는 포부와 아시아 최고의 음악제로 키우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면서 꼭 도와달라고 부탁하였다.

이에 티사 호는 본인의 부탁을 긍적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두가지를 충고하였다.

국제적으로 명성을 가지는 음악제가 되기 위해서는 첫째도 둘째도 유능하고 국제적으로 명망이 있는 C.E.O를 영입하는 일이며 그 다음은 일정수준(Global Standard)을 유지하기 위해 국제적으로 명성 있는 인물들로 구성되는 자문단을 설치하는 게 좋다고 하여 그 당시 스위스 루체른 음악감독을 끝내고 쉬고 계시던 토니 클라인(Tony Klein)을 소개해주었다.

그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티사호와 토니클라인을 초빙하여 이 문제를 논의 한바 적극적으로 두분이 도와 줄테니 우선 C.E.O를 선정해야 하는데 전세계 음악인를 상대로 국제공모를 하면 그 어떤 결과가 있으리라 하였다.

이에 본인은 이 두분을 중심으로 국제자문단을 구성하고 인터넷을 통하여 국제공모를 시도하기로 결심하고서 먼저 우리 내부에서 통영국제음악재단 이사회를 중심으로 선정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진규영(전 서울음대교수) 재단부이사장을 위원장으로 하고 통영현지 음악인 2인 외부인사 4인등 7명으로 구성하였다.

곧이어 위원장명의로 인터넷을 통하여 국제공모를 진행한 결과 12분이 응모하였는데 유럽중심 외국인 9분 국내인사 3분이었다. 국내인사 3분은 전직 영화감독 전직 지방문화회관 관장 등 비교적 음악과 무관한 분들이었고 유럽인 9분은 예술제 음악제 연주단체등의 수장을 역임한 쟁쟁한 분들이었다. 선정위원회에서 선정작업을 하는 동안 본인은 홍콩으로 날아가 티사호 ·토니클라인으로부터 응모자에 개인능력과 프로필을 자세히 들었고 국제공모안 공고이후 이들 두 분이 그들의 개인 블로그를 통하여 유럽의유력인사들에게 공모신청을 독려했다는 후문을 듣고서 본인은 사의를 표하였다.

귀국이후 선정위원에서 동양문화를 이해하는 위치에 있고(플로리안은 일본 가네자와 오케스트라에서 수석 챌리스트겸 부감독으로 10년간 일했다) 정통 독일인이며 미국의 시카고 대학에서 음악을 전공한 여러 경력 등을 참조하여 만장일치로 플로리안을 C.E.O로 선정하기에 이르렀다.

이 지면을 통하여 아무런 댓가없이 통영국제음악재단 대표를 선정하는데 뒤에서 큰 노고와 충고를 해주신 홍콩의 티사호 스위스의 토니클라인에게 다시한번 깊은 감사를 드린다.

새 국제음악재단출범이후 국제위원회(국제자문그룹)일원으로 여러충언과 고언을 아끼지 않으셨으며 본인의 재임기간 내내 음악회등 주요행사에 빠짐없이 참석해준 그 열정과 노력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는 바이다.

선정이후 초장기 왜 하필 외국사람을 C.E.O로 선정하느냐에 대한 비판적시각도 있었으나 그가 차츰 통영에 적응하면서 그가 보인 비전과 열성 일에 대한 성과로 이러한 시각은 사라지기 시작하였고 오히려 부산문화재단 등에서는 국제공모를 통하여 외국인을 감독으로 선임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서울의 예술의전당 세종문화회관등에서도 프로그램진행 리셉션 운영등 여러부분에서 통영을 벤치마킹하기 시작하였다.

본인은 취임이후 시정에 임하면서 먼저 공직자에게 세계적인 관점에서 생각하고 (Think globally) 행동은 지역실정에 맞게 (Act locally)라는 슬로건을 제시하면서 이의 실천을 독려하게 되었다.

플로리안도 이에 발맞추어 어렵고 난해한 고전음악, 특히 윤이상으로 대변되는 현대음악을 어떻게 현지화(localization)시키고 음악중심으로 통영의 문화콘텐츠를 관광과 어떻게 연계시키며 서울에 주제하는 유럽각국의 문화원과 연계하여 젊은 유망한 음악가를 어떻게 발굴하느냐에 대한 나름대로의 아이디어를 제시하였다.

첫째 방안의 구체적 실천대안으로 초·중·고등학교 학생들을 상대로 유명연주단이나 연주자가 통영에서 연주할때는 본 연주전에 반드시 무료로 학생들을 상대로 Lesson형 연주를 하게 함으로서 통영의 모든 초·중등생들 나중에는 거제의 중학생들까지 유명연주자와 자유롭게 대화하면서 연주를 즐기는 이벤트를 가지게 함으로서 클래식음악의 저변확대에 기여했다.

이를 위해 그는 통영의 대부분의 초·중등 교장선생님, 음악담당 선생님을 만나 대화하고 설득하였다.

그 결과 정명훈씨가 두 번에 걸쳐 통영학생들에게 무료 레슨공연을 제공하였고 프랑스 국립오케스단, 피아니스트 조성진 등도 무료공연을 제공하였다. 특히 조성진 공연시에는 학부형들도 많이 참서하여 대단한 성황을 이루었다.

먼 미래를 바라보며 현세대가 다음세대에게 해야 할 일이 이런게 아닌가 한다.

19세기 중반 영국을 중심으로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도시 빈민촌이 창궐하는등 자본주의 병폐가 만연하던 시절 영국의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거금을 기증하여 대영제국박물관에 연구소를 설립하고 언젠가는 어떤 천재가 나타나 자본주의 병폐를 치유 할 것이라 굳게 믿고서 이 연구소를 운영해 나가던 중 칼 막스가 이 연구소에 들러 세기를 뒤흔든 대역저 자본론(Das Kapital)을 발표하게 했듯이 우리도 제2의 윤이상 탄생을 소원한다면 우리세대는 이런 토양을 지속적으로 만들어 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유명 음악가에 연주를 듣는 수많은 학생 중 한 두명이라도 여기서 영감을 얻는다면 큰 수확이지 않겠는가?

또한 그는 통영국제음악제를 통영의 벚꽃축제인 봉숫골 축제와 굴 축제기간에 맞춰 3월말 4월초에 개최함으로써 통영경제의 큰 축인 관광과 연계시켰다. 특히 2017년 개최된 아시아태평양 관광지구(T.P.O)총회시에는 문화와 관광이라는 주제아래 하나의 세션을 주재하고 홍콩의 티사호와 스위스의 토니클라인을 강사로 초빙하여 일곱 개의 세션중 가장많은 인원이 참가하고 가장 인기 있었던 세션으로 평가받게 하였다.

또 서울에 주재하는 독일문화원 영국문화원 이태리문화원등을 본인과 함께 방문하여 젊은 음악가발굴에 동참하게 함으로써 독일 문화원주관으로 전액 독일문화원예산으로 젊은 음악가를 위한 showcase 프로그램을 진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영국문화원 이태리문화원으로부터는 상당액의 후원금을 받아내게 되었다. 또한 한국의 진출한 벤츠사 등 독일기업에 접촉하여 상당액의 후원금과 고급벤츠자동차등 현물지원을 받아내기도 하였다.

그는 또한 통영국제음악제단의 예산절감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2011년 통영국제음악제 개막전 일본의 후쿠시마에 쓰나미가 덮쳐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하였고 특히 원자력발전소에서 방사능이 유출되어 전세계적인 재앙으로 인식되었다. 그해 2월 개최예정이었던 통영국제음악제의 개막공연이 오스트리아잘스부르크의 챔버오케스트라연주로 예정된 상태에서 쓰나미와는 무관하게 진행되어가는 도중에 개막공연 48시간전 갑자기 가까운 이웃에서 발생한 방사능 유출을 빌미로 그들의 불참을 통보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해 개막공연은 갈라 콘서트로 적당이 때웠으나 통영시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어 음악 제·폐막이후 이미 그들에게 지불된 항공료, 출연료등 약 6천 여 만원의 환불을 요구하게 되었고 그들은 자연재해를 들먹이며 환불불가 입장을 고수하였다.

2012~2013 계속적으로 의회로부터 질책을 받게 되었고 국제적법적 소송으로 해결하려하니 장기간이 소요 될 뿐 아니라 소송비를 제외하고 나면 별로 남는것도 없는 상황이었다. 무척 어렵고 곤혹적인 상황에서 2014년 1월쯤 리임대표에게 모든걸 상세히 설명했더니 한번 노력해보겠다 하기에 약 1개월후 오스트리아로 출장을 보내게 되었다.

잘스부르크 현지에서 국제전화로 몇가지 해법을 제시하기에 절반은 현금으로 환불받고 절반은 그들의 연주로 가름하겠다는 안에 서로 합의하고 이 문제가 해결되었다.

합의 이후 그들은 곧 2천만원을 송금하였고 6개월 후 통영에서 ‘The week of Mozart’라는 주제로 일주일간 모차르트곡을 연주해 주었다.

지금도 본인은 리임대표가 아니었다면 이 문제는 미해결되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동안 우리나라에서의 유명외국 연주자 공연은 에이전트를 통한 연주팀 매지저와의 접촉으로 주로 이루짐으로서 그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리임대표 부임이후 그의 개인적·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상당액의 예산을 절감하게 되었다.

구체적 예를 들면 케이블카 천만명탑승 기념공연으로 조수미를 초청하게 되었을 때 리임대표와 조수미 매니저와의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 통상의 예보다 약 40~50%절감하게 되었고, 독일오스트리아등 유럽오케스트라공연은 거의 대부분 그가 매니저들과 직접 접촉하여 에이전트 몫을 절약하게 되었다.

2016년 유럽출장 당시 한국인 에이전트를 만났을 때 본인에게 리임대표 때문에 밥 굶게 되었다고 엄살을 부리는 것을 직접 듣기도 하였다.

이런 점은 행정사무 감사때나 회계감사시에 별로 노출되지 않고 묻혀있었기에 본인으로서는 무척 안타깝게 생각되었다.

또한 윤이상선생 유해송환에도 그는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2016년 가을경 국제위원회 개최지를 오스트리아 비엔나로 정하고 국제위원장인 본인을 비롯하여 토니클라인 티사호 플로리안등과 오스트리아 비엔나 린츠 독일의 베를린 하노바등을 방문하게 되었다.

이동중인 기차안에서 4인용칸을 빌려 국제위원회를 개최하고 2017년 윤이상탄생100주년 기념행사를 논의하게 되었다. 여러가지 논의중 본인의 제안으로 윤이상 유해를 통영으로 송환하자는데 의견일치를 보고서 본인과 리임대표가 각각 그 역할을 분담하여 진행하기로 하였다.

본인은 국내의 협의절차를 맡았고 리임대표는 독일정부 특히 베를린시 정부와의 협의를 맡아 이 일을 진행시키기로 하였다.

본인은 취임 첫해부터 이 문제에 착안하여 이명박 정부 말기 당시 안기부 담당자와 협으로 진행하였고 다시 정권이 바뀌어 문재인 정부 초기부터 청와대 국정원·외교부·문광부 담당자들과 협의를 진행하여 상당한 진전이 있었을 때였다.

그때 청와대 정무수석실에 백두현 현재 고성군수가 행정관으로 일하고 있어서 이 분을 통하여 관계부처와의 협으로 원활하게 진행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 지면을 통해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그 이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이명박 정부시절 보안당국과 이 문제를 협의한 게 빌미가 되어 보안당국에서 오히려 본인을 사찰했던 사실도 밝혀지게 되었다.

어찌되었건 윤이상 선생의 이념과 정치적 행보는 논외로 하고 우리 통영은 이분의 음악적 업적과 그 천재성을 기리고 기념하는 것이 정도라 생각하고 이분의 묘소가 통영에 있게 되면 우리 통영관광에도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통영이 현대음악의 아시아메카가 될 수 있다는 신념하에 관계부처를 설득하여 긍정적 반응을 얻게 되었다.

한편으로 리임대표가 담당했던 베를린 정부와의 협의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첫째는 독일현지의 반응도 윤이상작곡가는 이미 1972년 독일로 귀화한 독일인이었기 때문에 독일에서도 위대한 현대 작곡가로 기리고 싶어 했고 둘째는 묻혀있는 묘지가 베를린 시정부에서 관리하는 시민공원이었기 때문에 베를린시정부의 승인이 있어야 파묘와 이장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에 우리는 철저한보완이 요구되었던 사안이라 철저히 둘이만 알고 이 일을 조용히 진행하였다. 첫째 어려움은 생전 윤이상 선생이 고향통영을 그리워했고 사후에는 바다가 보이고 양지바른 통영의 어느 곳에 묻히고 싶다는 말씀을 상기시키기로 하였고 두 번째 문제는 현재 통영에 거주하고 계시는 부인과 유족이 윤이상 선생의 유해를 통영으로 송환하여 함께 지내고 싶다는 간절한 바램을 편지에 담아 베를린시 정부에 전달하기로 하였다.

얼마 뒤 2017년 11월경 남편 윤이상 유해송환을 간절히 바란다는 이수자여사의 편지를 소지하고 리임대표가 베를린에 가서 베를린시 정부와 협으를 진행한 결과 긍적적인 답변을 받아냈다. 우리가 편리한 날짜에 파묘해서 이장해가도 좋다는 공식통보를 받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베를린정부가 이장승인을 함에 있어 부인 이수자 여사의 간절한 편지가 그들을 움직였다고 여겨진다.

곧이어 파묘날짜를 정하여 베를린시 정부에 정식으로 통보하고 다시 리임대표가 급파되어 파묘와 이송을 준비하는 과정에 비행사에서 유골은 비행운송이 불가하다하여 그 유골을 현지에서 화장하여 항아리에 유해만담아 리임대표가 여행가방으로 직접 운송해 인천공항 김해공항을 거쳐 통영에 비밀리에 도착하게 되었다. 이 과정은 철저한 보안 속에 이루어졌으므로 그 내용은 본인과 리임대표만 알고있을 따름이었다.

통영 도착후 통영화장장 납골당에 약 한 달간 보존하다가 길일을 잡아 음악당 뒤쪽 바다가 훤히 보이는 양지 바른 곳에 안장하게 되었다.

안장일은 공개할 수밖에 없어 보도토록 하였더니 안장일 전후로 약간 소란스러웠음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는 또한 통영이 유네스코창의도시 음악도시로 선정됨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윤이상 탄생 100주년기념행사의 일원으로 유네스코로부터 창의음악도시 지정을 받고자 2016년부터 이 작업이 시작되었다.

내용뿐만 아니라 영문화작업등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아 이 작업 전체를 부산소재 모 대학에 상당한 예산을 들여 용역을 의뢰하기로 하고 그 용역이 진행되는 동안 통영시에서는 캐나다에서 경제학석사학위를 받은 젊은 인재를 특별채용, 이 일을 담당하게 하고서 별도의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자료수집 시민 홍보 등을 진행하였다.

용역결과물의 중간보고를 거쳐 최종보고하는날 본인은 경악을 금치못했다.

통영이 보유하고 있는 음악적 자원과 자산을 총 망라하고 각 자원별 역사성을 고찰함과 동시에 이를 바탕으로 이 도시를 음악을 중심으로 어떻게 가꾸어나가겠다는 의지를 영문으로 조목조목 기술하라는 용역이었는데 영문이 아닌 국문으로 된 감상문 같은 산문 A4용지 열장내외의 용역보고서 였던 것이다. 당시가 유네스코가 요구하던 신청서접수마감시간 48시간 전 이었다.

아~이를 어쩌리오!

용역 보고팀들 관계자들 관련공무원들 다 내어보내고 리임대표를 급히 시장실로 불렀다.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보고서를 보여주었더니 그도 한숨만 내쉴 뿐 무슨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지금부터 48시간이 남아있으니 당신이랑 나와 둘이서 이틀 밤새면서 죽이되든 밥이되든 해보자는 본인의 제의에 그도 흔쾌히 동의하였다.

그날 오후 6시 음악당 소회의실에 작업실이 차려지고 본인, 리임대표, 담당자, 추진위원장, 문화예술과장, 담당자들이 모이게 되었고 PC등 여러 가지 사무장비들이 설치되었다. 작업은 먼저 통영의 음악적 자산자원을 총 정리하였고 이를 기초로 음악도시를 가꾸어 나가겠다는 의지를 강조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또한 본인과 리임대표가 먼저 유네스코가 제시한 신청양식에 따라 어떤 내용을 어떻게 기술할지를 결정한 다음에 리임대표가 이를 문장으로 만들면 옆에 앉은 담당자가 PC로 작업하고 스크린에 띄우기로 하였다.

본인은 스크린에 띄워진 내용을 수정·보완할 것 등으로 재분류해 손질하고 최종문장을 확정지었다. 그 결과 예상보다 빠른 진도로 진행되었다.

저녁을 건너뛰며 밤늦게 까지 이 일을 진행하는 과정에 추진위원장이 바로 옆에서 해 주던 김치찌개가 얼마나 맛있었든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 그 순간을 함께 했던 위원장 및 관계공무원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이틑날 정오쯤 38개 항목에 대하여 40여 페이지에 달하는 신청서 작업을 마무리하고 마감 8시간 전 파리에 본부를 두고 있는 담당부서에 신청서를 접수하게 되었다. 드디어 12월23일 음악도시로 지정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우리는 이날 서로 껴안고 건배축배를 높이 높이 들었다.

지금 돌이켜봐도 이런 상황에서 리임대표가 없었더라면 이 일이 가능했을까?

그럼 다른 도시에서는 어떻게 하는지 그 뒤에 알게 된 바로는 신청서 작성을 위해 영어가 모국어수준인 대학교수 3~4명을 중심으로 팀을 구성하고 거금이 소요되는 예산을 투입하여 턴키계약 용역을 준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제 그는 떠났다.

빈자리가 크게 보인다. 그가 한 일 그의 열정 그의 숨소리가 시간이 갈수록 커질 것이다. 본인이 당초 예상했던 그 이상을 훨씬 뛰어넘는 탑을 쌓고 간 사나이다.

그가 7년간 통영에서 일하는 동안 그의 개인생활에도 경사가 많았다. 여기에서 결혼도 하고 예쁜 딸도 얻었다.

이제는 국제적인 명사가되어 스위스제네바에 본부를 두고있는 국제음악콩클세계연맹(World Federation of Internationl Music Competition)에 일하게 되었단다. 다시 한번 그의 미래에 밝은 빛이 비추기를 기원한다.

그가 재임하는 기간 동안 개최되었던 국제음악제는 해마다 주제를 다르게 하며 새로운 유명연주단을 초청하여 명실 공희 현대음악 아시아의 메카로 자리 잡아 나갔다.

이러한 내용들은 국내언론보다 독일의 유명언론 미국의 NYT등 국제적인 언론에서 크게 다루어줌으로서 통영의 국제적위상이 한결 높아졌다.

통영국제음악제가 그의 업적을 바탕으로 앞으로도 더더욱 진전되고 발전되기를 기원해 마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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