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서울치과의원 김택청 원장 “여생 의료봉사로 보답”

의료용 두건 사이로 흰머리가 희끗한 통영서울치과의원 김택청(79) 원장.

선한 인상에 배려심 가득한 다정한 말투의 김 원장은 고향 통영을 단 한 번도 잊은 적 없다고 말한다.

통영시 문화동 50번지에서 태어난 김 원장은 통영초등학교를 3학년까지 다녔고, 당시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의 발령에 경남 일대를 전전하며 소년기를 보냈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 다시 통영으로 귀향, 공부를 너무 하고 싶었던 어린 소년의 희망은 아버지의 반대로 무산됐다.

이후 통영의 반치과에 취직해 기공사로 1년 남짓 기술을 습득했다.

김 원장은 “당시가 59년도였다. 태풍 사라가 휘몰아칠 때 뚝지먼당에 있던 집에서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었다. 이대로는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인간답게 살게 해달라고. 그렇게 태풍이 지나가고 사흘 후 옷가지와 책 몇 권을 들고 무작정 상경했다”고 회상했다.

치과에서 습득한 기공 기술을 바탕으로 서울에 있는 치과에 재취직해 일하고 있던 어느 날, 서울에서 가장 의료 수준이 높았던 한전부속병원의 치과 기공실장 모집공고를 실은 신문이 그의 눈에 띠었다.

당시 김 원장은 한전부속병원 치과 기술이 어느 정도인지 알기 위해, 또 단순한 호기심에 모집공고에 응했고, 까다로운 실기와 필기시험을 치렀다.

그 결과 16명의 지원자 중 유일한 합격자로 한전부속병원 기공실장으로 치과와의 인연을 이어갔다.

그는 그 당시를 “모집공고를 확인하고 호기심에 이력서를 접수했던 것 그 모든 것이 나를 치과대학으로 보내게 된 기적과도 같은 일 이었다”고 미소 지었다.

그 후 치기공사가 아닌 치과의사가 되기 위해 경희치과대학에 진학, 6년간 하루 3시간 쪽잠을 청하며 의사 가운을 입기 위한 힘든 여정을 보냈다.

특히 69년도 결혼해 가정을 이뤘던 그에게 갖가지 어려움이 있었지만 밤에는 치과기공사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가정을 돌봤다.

그렇게 치과대학 졸업 후 치과 의료 수준이 높았던 당시 명동일대, 그 중에서도 명동입구에 치과를 개원했다.

이후 강남 논현동 YMCA에서 수십 년 치과를 운영했고, 평생을 그리워하고 잊은 적 없는 고향 통영으로 돌아왔다.

늘 고향을 떠나 있었지만 ‘노후에는 고향에서 마지막 인생을 살리라’는 다짐은 그의 가슴에서 단 한 번도 잊혀 진 적 없었다고 강조한 김택청 원장.

숱한 어려움과 고난 역시 늘 그와 함께였다. 그는 “제2의 인생이 아닌 ‘덤으로 사는 제3의 인생’을 고향 땅에서 시작한다”고 담담히 말했다.

제3의 인생 역시 크리스천인 그의 인생관을 바탕으로 지역의 소외된 이웃들을 대상으로 의료봉사에도 앞장설 계획이다.

2년 전에는 시카고 그레이스교회 소속 한국낙도선교회, 통영호주선교사기념사업회와 함께 낙도 의료봉사에 나서 훈훈함을 전하기도 했다.

국문학을 전공했던 그는 서울 문예비전 등단시인으로도 활동, 붓이나 펜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특히 그의 고향사랑은 그의 시 ‘내 고향 통영’에도 여실히 담겨있다.

김택청 원장은 “남은 생은 정말 덤으로 사는 제3의 인생이다. 그 제3의 인생을 고향 땅에서 시작할 수 있어 얼마나 영광이고 뜻 깊은지 모른다. 앞으로 여생도 고향에서 봉사하고 베푸는 삶으로 채워갈 것”이라고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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