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순신 장군은 어떤 존재인가? 성인(聖人)에 버금가는 성웅(聖雄)이라 부를만한 위대한 분인가? 23전 23승의 불패의 장수인가? 신출귀몰하는 노련한 전법을 구사한 해상 전략가인가? 적을 살상하고 섬멸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갖춘 무인(武人)인가? 군율을 지키기 위해서는 부하의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다룬 냉혈한인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서는 어떠한 타협도 할 줄 모르는 벽창호인가?

하지만 이 모든 수식어와 호칭에 앞서 이순신을 바라보는 키워드는 '백성'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영화 <명량>에서 이순신 장군의 정체성은 이 한 마디에 녹아있다. "무릇 장수 된 자의 의리는 충을 좇아야 하고, 충은 임금이 아니라 백성을 향해야 한다. 백성이 있어야 나라가 있고, 나라가 있어야 임금이 있다"

평소에는 나약하고 비겁하고 제 살 궁리만 하며 정치 현실에 눈감는 어리석은 백성, 그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건 사람. 단 하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밤낮으로 고뇌하고, 군율을 엄하게 세우고, 단 한 명의 적이라도 더 죽여야 하고, 타협하지 않고, 심지어 항명도 마다하지 않았다. 하나의 목적을 향한 그의 충정을 놓치면 "23전 23승의 무패 장수"라는 허울을 좇게 된다.

백성을 향한 그의 충정을 우리는 '생명'과 '평화'를 향한 염원이자 '사랑'이라 부른다. 생명을 살리기 위해 불살생의 계율을 어기고 칼을 들었던 승병들처럼 이순신 장군의 호령은 적을 죽이는 데 목적을 두지 않았고, 오로지 백성을 살리고 평화를 되찾기 위한 것이었다.

영화 <명량>에서 이순신 장군은 전투가 끝나고 혼잣말처럼 생명에 대한 연민을 내뱉는다. "이 쌓인 원한을 어이할꼬!" 김한민 감독은 관객들이 이 말에 주목해주길 바랐다고 한다. 그러나 국민들의 선택은 '백성'이었다. 하지만 둘은 다르지 않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순신 장군이 다시 온다면 어떤 말씀을 하실까?

지금 우리에게 전장(戰場)이 있다면 한반도가 아니라, 우리 마음속이 전장이다. 동족상잔의 아픔을 치유할 생각은 하지 않고, 최소한의 인도적 지원마저 악마의 자식을 먹이는 것이라며 악다구니하는 우리 마음이 전쟁터다. 생명과 평화, 인권을 이야기하면서 굶주리는 북녘 동포들을 외면하는 무자비(無慈悲)함이 전쟁터다.

우리가 반드시 싸워 무찔러야 할 적은 특정한 국가가 아니라, 어리석음이다. 남북통일에 필요한 초기 투자 비용이 부담스러워, 세계 일류 문화국가로 성장할 수 있는 통일 대한민국의 꿈을 외면하는 어리석음 말이다. 정체국면에 접어든 한국 경제의 한계를 보고서도 '우리끼리 잘 먹고 잘살자'고 주장하는 어리석음. 미국을 끌어들여 중국을 배척하고, 중국을 끌어들여 미국을 배척하려는 어리석음 말이다.

발해멸망 이후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문화강국으로서의 위상과 자주독립의 완전한 실현, 이것이야말로 '오늘의 이순신'이 꿈꾸는 것이리라. 환경파괴로 인한 재앙, 새로운 전염병의 창궐, 4차산업기술의 도래로 인한 인간 정체성의 혼돈, 자본주의의 폐해로 인한 양극화와 인간성 상실,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하는 진정한 문화강국의 꿈 말이다.

이들 과제를 해결하는 키워드가 바로 '생명'과 '평화'요, 그것을 이루는 힘은 오로지 '사랑'에서 나온다. '오늘의 이순신'이 살아가는 이유이다.

저자 주. 이상으로 10회에 걸쳐 쓴 '오늘의 이순신' 연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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