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들지도 않고, 꺾을 수도 없는 꽃이 있다면, 그것은 일생을 바치면서 헌신으로 피워낸 꽃이 아닐까 싶다. 그런 귀한 꽃을 찾아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본다.

60년대 초의 어느 날 신문에, '미감아(未感兒)는 어디로 가나' 라는 제목의 신문기사를 본 당시 23세의 처녀 김경련은 마음에 폭풍이 일어난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감전(感電)이라도 된 듯 중대한 사명감이 설레었다.

나환자의 몸에서 출생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부모로부터 강제 분리되고, 일반인으로부터도 격리 수용 당해야하는 미감아들. 아무도 가까이 하기를 꺼려하는 그들은 추위와 배고픔과 목마름에 시달려야만 했고, 아무리 울어도 그 울음조차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김경련 처녀의 귀에는 환청으로 뚜렷하게 들려왔다. 누군가가 그들의 눈물을 닦아줄 위로의 손수건을 쥐어주는 듯도 했다. 그런 자극으로 미감아들을 위해 한 목숨 바칠 것을 결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날부터 작업복 두벌을 달랑 챙겨들고, 신문에 보도된 '영심원'을 찾아갔다. 그리하여 외딴 초가집에 누더기를 걸치고 짐승처럼 꾸물거리는 열두 명의 아이들을 만난다. 형색은 걸인 같으나 눈빛만은 모두 천사였다. 그들을 만나는 순간부터 어머니 역할이 시작되었다.

우선 3개의 방을 구분해서 사용하기로 했다. 하나는 남자 아이들의 방, 또 하나는 여자 아이들의 방, 나머지 제일 작은 것은 자신의 방으로 정했다.

첫날부터 빨래며, 아이들의 목욕, 보리방아를 찧어 밥 짓기, 찬 만들기, 땔감 마련하기, 양식 구하기 등 앞이 캄캄했다. 잠시도 허리 펼 틈이 없었다. 혼자서 감당해 내기 어려운 형편인데다, 교사 역할까지 겸해야 했다. 미감아는 그 당시 일반학교 등교를 거부당했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또 아이들 중에는 병치레가 잦은 아이도 있었는데, 밤중에 아픈 아이를 엎고 멀리 있는 병원을 찾아 뛰는 것은 또 다른 큰 고역 중에 하나였다.

이런 갸륵한 소식이 세상에 알려지자 미국의 어느 노파(老婆)를 비롯한 독지가의 출연(出捐)으로 풍광이 아름다운 통영 바닷가에다 현대식 건물을 짓고 '신애원'이란 명칭으로 복지시설 등록을 할 수 있었다. 한 때 미감아가 70여 명까지 달한 때가 있어 중학교 과정까지 운영하게 되었다. 그렇게 벅찰 무렵, 뜻을 같이하는 강두삼 청년이 나타나 적극 도와주었다. 오랫동안 일을 같이하다가 뜻이 맞아 결혼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어느 덧 세월은 흘러 미감아 세계에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새로운 미감아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나환자촌에도 젊은 세대는 없고 고령만 남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70년대 중반부터 새로운 사업을 추가하게 되었던 것이다. 미 자립 모자세대가 자립의 기반을 마련할 때까지 3년간 기초생활을 보장해주는 사업이다. 정부 지원을 받으며 시설 정원 20세대(65명) 선을 유지했다. 이제 정상적인 체제로 큰 어려움 없이 운영되기 시작했다. 그 운영의 중심에는 남편 강두삼 장로께서 늘 열심히 지켜주고 있었다. 그리하여 지금은 수만 평의 대지 위에 교회를 비롯한 필요시설이 확충되었으며, 25억 재단의 튼실한 복지시설로 자리 잡았다. 이제는 아들(강철)에게 원장을 물려주고 지켜보고 있다.

그러는 동안 23세였던 처녀는, 83세의 노파가 되었지만, 보람의 향기 속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는 한 송이 꽃으로 남았다.

자신들만의 안일을 위해서 극악(極惡)에 처해 있는 이 세상에서, 이보다 더 아름다운 헌신과 보람의 꽃이 또 어디에 있으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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