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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통영예총 워크숍을 다녀와서

기사승인 2019.07.12  09:5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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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 아래 아름다운 고을' 강화도 일원 탐방

   

통영예총에서는 지난달 22∼23일 양일간 통영예총 회원 및 관계자를 대상으로, 인천시 강화군 강화읍 강화도 일원의 역사 사적지와 예술문화시설 탐방을 통해, 지역 예술문화발전을 도모하기위한 워크숍을 개최했다.

강화도는 1 제주, 2 거제, 3 남해, 4 강화라는 위치를 당당히 점유하고 있는 섬이다. 엄격히 말하자면, 김포반도에서 구릉성 섬으로 떨어져 나와 독립된 지명을 획득한 섬으로서, 현재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소속이다.

첫날 탐방지인 전등사는 대웅전(보물 178호)과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의 목판 104장, 약사전(보물 179호), 범종(보물 393호) 등으로 예로부터 그 명성이 자자하다.

역사적인 전적지로서의 갑곶돈대는 1232년 고려가 강화로 천도하고 1270년(39년간)까지 몽골과 줄기차게 항전을 계속하던 곳이다. 강화도의 관문이며 한강을 수호하던 중요한 요충지로 알려져 있다. 그 이후 이곳은 1866년 9월 천주교 박해를 핑계로 쳐들어온 병인양요를 맞아, 프랑스군과 격렬하게 전투를 한 곳이다. 그해 11월 7일 올리비에 대령이 이끄는 프랑스 해병 160명은, 정족산성을 공략하려다가 잠복하고 있던 500여 명의 조선군 사수들에게 일제히 사격을 받아, 큰 인명손실을 입고 간신히 갑곶돈대를 통해 달아났던 기념비적인 곳이다.

강화 12보 중의 하나인 덕진진(德津鎭)은 1679년 용두(龍頭)·덕진 등 2개의 포대축조로부터 발전되었다고 한다. 1866년 병인양요 때는 프랑스 군을 격퇴하였다. 1871년 신미양요 때도 미군함대를 격퇴시키는 전과를 낳은 곳이기도 하나, 그해 초지진에 상륙한 미국해병대에 의해 마침내 점령당하는 비운도 겸한 곳이다.

초지진은 1716년(숙종 42년) 강화도 해안선을 지키기 위해 조직되었다 한다. 1871년(고종 8년) 미군해병에 의해 화력의 열세로 점령당하고, 1875년 8월 21일엔 일본함정 운요호에 의해 폐쇄되는 불운을 안는다. 1973년 초지돈만 복원 현재에 이른다는 설명이다.

광성보(廣城堡)는 1658년(효종 9년) 축조된 해안경비부대 주둔지였다. 1871년 신미양요 보복으로 미국 해병대가 전함 5척을 이끌고 와 조선군은 이에 맞서 싸웠으나 대패를 당한 곳이다. 조선 후기 무신 이재연장군을 기리는 전적비와, 그날의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용사들의 무덤인 신미순의총이 자리하고 있다.

다음날은 강화도 고려궁지를 둘러보았다. 이곳은 몽골군의 2차 침략을 피해 고려의 왕도를 옮긴 곳으로, 현재의 7배 크기정도로 방대한 규모였다는 것이다.

결국 몽골은 고려와 화친을 원하게 되고, 고려 원종은 1270년 5월 몽골과 협약을 맺고 환도하게 된다. 그때 몽골의 요구로 궁궐과 성은 철저히 파괴되고 폐허로 남았다가, 후일에 후금과 전쟁의 위협에 도달하자 인조 9년에 예전 궁터에 행궁을 건립 현재에 이른다.

다음은 강화도 제석봉 통일전망대 관람을 들 수 있다. 마침 날씨가 쾌청해서 북한까지의 직선거리 약 2.3km보다, 훨씬 너머 아득한 곳까지를 꿈결같이 가깝게 느껴질 정도였다. 부르면 선뜻 손 내밀 것 같은 혈족의 거리로 못내 아쉬운 테두리 안이다. 해안가를 더듬어보면 북한 예성강이 흐르고, 임진강과 한강이 한 눈에 확 밀어온다.

우측으로 개성공단 지역과 아슴푸레 김포 애기봉 전망대와 파주 오두산 통일전망대, 일산신시가지까지 도드라지게 확보되는 곳이다.

좌측으론 중립지역인 나들섬 예정지와 선전용 위장마을, 개성공단의 탑, 송악산, 각종 설치물 등을 조망할 수 있어 신비롭기까지 한 장소였다. 

이 외에도 강화도 역사관과 민속박물관과 석모산 보문사가 일정으로 잡혀 유익한 문화탐방을 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이번 2019년 통영예총 워크솝을 통해, 강화도는 외부 세력들의 침략에 대한 피신처로, 한편으로는 한양을 침범하지 못하게 하는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역할을 도맡아 했던 셈이다. 이 과정에서 피비린내 나는 비극도 맛본 곳이다. 나아가 이 아픔(고려시대엔 우리나라 전역을 통해 약 529 차례나 왜구가 침입했다는 자료를 접한다)을 교훈삼지 않음으로서, 외세의 침입에 대한 무대책 무방비로 일제의 36년간 굴욕의 길을 들어서는 비통함도 맛보았다는 생각이 뇌리를 지배하게 되었다.

또한 남북이 대치된 상황에서 지척의 근거리를 두고도 오도 가도 못하는 우리 8천만 겨레동포(절실한 남북한 실향민과 탈북 민들 포함)의 아픔을 되새겨보는 계기가 되었다. 이 허전한 역사를 뒤로한 채 탐방을 끝내고 오는 우리들은 아! 아쉽고 슬프고 애달프다는 서로의 찡한 공감대를 공유하게 되었다.
 

김보한 시인·시민기자 hannews@chol.com

<저작권자 © 한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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