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앞에서도 우상에 머리 숙일 수 없다. 신사참배 끝까지 거부한다
이 한목숨 오로지 나라를 위해, 겨레를 위해 다 바치리라"

최덕지(첫줄 왼쪽 5번째)가 1925∼1929년 운영한 도천 야학교 학생들과 함께 찍은 모습. 사진은 2016년 출간된 최덕지 목사 전기 '이 한목숨 주를 위해'를 엮은 경남대 송성안 교수 제공.

대한민국 최초의 여목사 최덕지…통영독립운동의 시작과 끝, 4차례 옥살이 투사
지난 6일 국회, 항일여성독립운동 신앙인 최덕지 조수옥 재조명 학술세미나 개최
한국항일운동 및 통영교육사, 한국교회사 중요인물…독립운동가 서훈 운동 시작
전국 교회, 신사참배반대 독립운동가 서훈 국회 입법청원 100만 서명운동 전개


 

첫째 이 나라의 독립과 회개를 위하여
둘째 봉건적 인습타파와 미신타파를 위하여
셋째 인신매매와 공창제 폐지를 위하여
넷째 남녀차별 철폐와 한국교회를 위하여


통영 여성항일운동의 대명사 최덕지(1901-1956)의 평생 기도 제목이다.

3.1절을 맞아 국민 청원과 국회 특별법 제정 등으로 정부는 유관순 열사에게 대한민국 으뜸 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가 서훈하는 등 여성독립운동가 재발굴 사업이 범국민적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정부수립 후 독립운동 유공자는 2019년 3월 현재 총 15,511명, 여성은 432명으로 여성독립운동가 서훈은 전체독립운동 유공자의 3%에 불과할 만큼 인색한 실정이다.

그나마 지난 1년 동안 여성독립운동가 136명을 새로 발굴, 서훈했지만 최덕지를 비롯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펼친 여성독립운동가들은 그 대열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당시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우리 민족의 또 다른 정신적인 3.1운동이라 일컫는다.

이는 신앙적인 투쟁 뿐 아니라 일제의 황민화 정책을 거부한 그야말로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는 양심의 최후 보루였다.

당시 조선·동아일보, 매일신보는 어느 교회가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있는지를 시시각각으로 보도한 바 있다.

신사참배 반대투쟁은 단순한 종교적인 문제를 넘어서 일본을 향한 민족적인 저항 의거이자 독립운동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일제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여느 독립운동가들의 독립투쟁과 똑같이 일본 국가의 권위와 체제에 도전하는 행위로 간주, 불경죄 및 치안유지법 위반 등의 중형으로 5,6년씩 옥고를 치르게 하고 혹독한 고문으로 주기철(독립장), 최상림(애국장), 이현속 등 순교에 이르는 이도 상당했다.

최덕지와 권수옥은 경상도 특유의 신앙적 의리감으로 일제의 온갖 회유와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했다. 이들은 부산의 안이숙과 함께 옥중에서도 믿음의 여성 3인방으로 불리며 많은 감동을 준 일화들이 전해오고 있다.

신사참배반대 출옥성도들을 중심으로 설립된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총회 김성복 총회장은 "그동안 이들이 독립운동가로 서훈되지 못한 까닭은 역사의 주 무대인 중앙에서 비껴나서 경남과 부산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이력 탓과 순교신앙, 그리고 마치 한국교회는 일제강점기 36년 동안 일본에 협력한 친일집단인양 왜곡, 폄하되고 있는 현실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김 회장은 "지금이라도 그분들의 발자취를 후세들에게 바로 알리고 전승해야 할 우리의 책임"을 강조했다.

이런 뜻들이 모여 지난 6일 국회 차원의 '항일여성독립운동 신앙인 최덕지·조수옥·안이숙 재조명 학술세미나'가 개최됐다.

이주영 국회부의장 중심으로 김진표·이혜훈 국회의원, 사단법인 아침이 함께 주관하고,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국가보훈처,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재건교단 총회), 기독교한국침례교회 총회가 특별 후원했다

이번 국회 학술세미나는 최덕지·조수옥 등 신사참배반대운동을 펼쳤던 신앙의 선각자들과 연고가 있는 경남·부산지역구 국회의원들과 정무위원회 소속 여야 국회의원 19명(김규환 김성찬 김정훈 김한표 박완수 엄용수 여상규 윤한흥 이학영 전재수 조경태 지상욱 등)이 협력의원으로 동참하게 된 점도 특이하다. 

그동안 독립운동의 보조역할자로만 평가됐던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역할에 대해 재평가의 장이었다.

또 '우상에 머리를 숙일 수 없다'며 신사참배 반대운동과 여성 인권과 고아, 약자들을 위해 헌신한 최덕지 등 민족지도자들의 삶을 되돌아보는 감동도 안겼다.

최덕지(1901.6.25 - 1956.5.1)는 통영시 항남동에서 태어나 대화정교회(현 충무교회)를 다녔다. 호주 선교부에서 설립한 통영 진명 여학교와 마산 의신여학교에서 신앙 교육과 민족 교육을 받았다.

1931년 3월 19일 촬영된 통영최초의 유치원인 진명유치원 졸업식 기념사진이다. 사단법인 통영사연구회 박형균 회장이 한산신문 643호(2004년 1월 31일자) 1면에 공개한 이 사진은 우리나라 대표적 여성항일 운동가 최덕지와 통영교육의 선구자 스키너 선교사 등 우리나라 여성운동을 주도한 거물급이 한자리에 모여 의미를 더하고 있다. 항일운동의 대명사 최덕지(3번째), 유치환의 부인 권재순(5번째)씨가 당시 교사로서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1919년 3·1 만세운동 당시 태극기 제작 등으로 진명유치원 교사들과 함께 만세시위에도 참여했다. 진명유치원, 도천리 유치원, 동부유치원과 야학교 등으로 교육을 통한 민족운동을 펼쳤다.

그는 우리가 일제에 나라를 빼앗겨 가난해도 몸마저 더러워서는 안 된다고 학생을 가르치며, 아이들의 때 묻은 손발을 손수 씻어주는 열정적인 교육을 펼쳤다. 당시 그의 민족운동은 농촌계몽운동이요, 구국 교육운동 차원이었다.

그는 1920년에 와서 통영 여자청년회, 근우회 통영지회, 통영부인회 등 당시 통영에서 조직된 대부분의 여성 민족운동 단체에 가담해 여권신장을 위한 신여성 운동, 교육 운동 등 민족운동을 펼쳤다.

특히 1927년 통영 근우회 회장으로 선임, 통영지역의 항일 민족운동에 앞장서며 누구 못지않게 민족을 생각하며 고민했다.

1932년 호주 선교사 신애미(A.M. Skinner, ?∼1954. 7. 9)의 추천을 받아 평양 여자신학교(평양여자고등성경학교)에 입학·수학했다. 1935년 졸업과 동시에 호주 선교사 태매시(태드, M. G Tait)의 요청으로 호주 선교부 마산지부 전도사로 활동했다. 또한, 간이학교 등을 열어서 교인들과 지역민에게 한글 교육 등 초보적인 근대교육에도 앞장섰다.

1938년 한국교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하자, 최덕지는 주기철(1897∼1944) 목사, 한상동(1901∼1976) 목사 등과 함께 경남지역에서 조직적으로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벌이다가 투옥됐다. 비밀결사죄와 내란죄가 죄목이었다. 옥에 갇힌 뒤에도 금식으로 옥중 투쟁을 이어가는 독립투사였다.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8·15광복을 맞이해 8월 17일 평양형무소에서 나왔다. 그는 신사참배뿐만 아니라 궁성요배(황성요배: 천황이 사는 곳), 일장기 경례, 창씨개명(일본식 이름) 등 일제가 민족 말살정책의 하나로 한국민에게 강요했던 모든 정책에 대해 철저히 반대한 인물이자 1952년 재건교회 장로교 최초의 여자 목사이다.

'최덕지를 중심한 신사참배 반대운동'이라는 주제로 발제에 나선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김정일 교수는 "당시 평양형무소에 투옥된 21인의 기독교 지도자들 중에서도 최 목사는 가장 맹렬히 투쟁한 분이었다"며 "유교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여성으로서 400여 명의 교회 지도자들을 조직하고 민족운동에 앞장설 수 있었던 건 기독교 신앙 정신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또 김 교수는 "출옥 후 최 목사는 신사참배로 무너진 한국교회를 바로 세우는 교회재건활동을 전개했다"며 "철저한 회개와 주일성수, 그리고 우상타파를 내세우고 한국교회가 일제 잔재를 청산해야 한다는 입장을 펼치며 재건운동에 앞장섰다"고 설명했다. 

이날 무엇보다 또다른 정신적 3·1운동으로 평가되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져야 한다는 데에 참석자들의 의견이 모아졌다.

세미나를 주최한 이주영 국회부의장은 "최덕지 목사와 조수옥 권사는 경상도 특유의 신앙적 의리감으로 일제의 온갖 회유와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절개를 끝까지 지켜냈다. 일사각오의 그 외침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큰 가르침이 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혜훈 국회의원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도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신앙적 양심 뿐만 아니라 일제의 정책에 대항한 민족 정신을 지키는 항일운동으로 평가한 바 있다"며 "신사참배 반대에 앞장선 분들에 대한 독립유공자 서훈이 속히 이뤄져야 한다"고 밝혔다.

김진표 국회의원 역시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도 아직 독립운동가로 서훈받지 못한 분들이 많이 발굴되어 그에 걸맞은 합당한 예우를 받으실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사단법인 아침 최수경 사무총장은 "지금껏 국가보훈처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펼치다 순교한 주기철(독립장), 최상림(애국장), 주남선(애국장), 손양원(애국장) 등 상징적인 몇 분들에게만 겨우 서훈할 만큼 인색했다"고 지적했다.

특히 "최덕지와 함께 반대운동을 한 김두석은 서훈이 됐지만 신간회의 외곽 여성단체인 근우회 통영지회장으로 독립자금 모금에도 앞장섰고, 한상동 목사와 함께 전국적인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했음에도 서훈이 되지 못했다. 심지어 과거사 진상위원회에서 조차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항일독립운동으로 평가, 결론 내렸음에도 서훈이 되지 않고 있다"고 국가보훈처의 시급한 개선을 촉구했다.

이에 사단법인 아침은 '신사참배 반대운동 신앙인들을 독립운동가로!'라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독립운동가 청원 100만 서명운동'을 범한국교회적으로 전개하는 것은 물론 국회 입법청원도 추진할 예정이다.

또 통영 부산 창원 등 지역순회 학술세미나와 신사참배 반대운동 참여자 발굴 및 전국적인 피해 전수조사도 계획하고 있다.

종교를 넘어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독립운동 자금모집은 물론 5대 황민화정책을 모두 거부한 항일여성독립운동의 대명사 최덕지. 

"여성으로서 하지 못할 일은 없다"고 자신하며 통영근대교육과 여성인권 신장에도 앞장섰던 그는 분명 그 시대가 요구한 지도자였다.     

"일어나라! 오너라! 단결하자! 분투하자! 조선의 자매들아! 미래는 우리의 것이다"라는 근우회의 결의문이 굳이 아니라도 최덕지는 대한민국 여성 민족운동 독립운동의 표상 그 자체이다. 

1945년 8월 15일, 감격스러운 조국 광복을 맞았다. 일제는 8월 18일 최덕지를 비롯 독립운동가들을 죽여 없애려 했다. 8월 17일 밤 꿈같은 일이 일어났다. 옥문이 열리고 평양 형무소에서 출옥했다. 최후까지 남은 14명이 독립의 감격과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이들은 이날 안이숙 모친의 집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그때 기념으로 찍은 사진이다. 사진 첫째줄 왼쪽부터 최덕지 이기선 방계성 김화준 오윤선 서정환, 둘째 줄 왼쪽부터 조수옥 주남선 한상동 이인제 고흥봉 손병목 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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