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의 산실 옛 통영청년단 회관, 통영항일운동기념관으로 활용하자" 시민문화운동

 

독립유공자 후손 모임 3.1동지회 통영지회 주축 서명 운동 한창
옛 통영청년단 회관 리모델링 독립운동 전시장과 교육실 등 활용
3.1 문화상 제정, 향토사랑 교과과정 반영, 애국애족 시민교육장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의 산실인 통영청년단 회관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당초 설립의 뜻에 부합하는 통영항일운동기념관으로 개관하고자 하는 것이 우리의 의지다. 많은 시민들이 그 뜻에 동참, 서명을 하고 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통영독립운동의 산실인 옛 통영청년단 회관을 통영항일운동기념관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시민문화운동이 일고 있다.


3.1동지회 통영지회(회장 고석윤, 사무국장 이명) 주축으로 펼쳐지는 이 운동은 현 문화원 앞에 위치한 통영청년단 회관(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36호)을 그 본뜻에 맞게 통영항일기념관으로 전환, 독립운동전시장과 시민교육장으로 변모시키자는 취지다.

일제강점기 1919년 3.1독립만세 직후 통영 만세운동을 주도한 청년들은 만세-체포-구금-투옥으로 이어지는 과정의 반복이 능사가 아님을 깨달았다. 자주독립을 쟁취하는데 있어서 보다 더 근본적이고도 실질적인 도움이 될 무엇인가를 찾기 시작했다.

그 결과 통영의 우국청년들이 북신동 송정택의 사랑방에 청년들이 모여 몇 차례 숙의를 거듭한 끝에 항일민족운동을 위한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단체가 필요함을 확인했다.

1919년 7월 21일 청년 341명의 회원을 모아 마침내 '통영청년단'을 창단하고 초대단장에 박봉삼을 추대했다.

박봉삼은 1875년 통영 서호동에서 태어나 1915년 통영기독청년회 회장이 돼 각종 집회나 강연 등을 통해 자주독립사상을 일깨웠고, 1919년 3월 13일 통영장날 만세의거 계획이 무산될 처지에서도 만세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실질적인 지도자 역할을 했다.

자주독립을 위한 통영청년단이 나아갈 진로가 설정이 되자 일은 급속도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들의 이상은 높았으나 단원들의 구심체가 될 사무실도, 사업을 시행할 기금도 없는 열악한 형편이었다.

어느새 청년단의 사무실처럼 되어버린 송정택의 사랑방에서 의논을 거듭한 결과 단원수를 늘리고 청년회관 건립을 위한 모금운동을 펼치기로 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지방유지 130여 명이 기금출연을 약속하고 이영재가 대화정 238번지의 남새밭 254평을 회관 건립부지로 선뜻 내 놓았다.

청년회관 건립 부지가 확보되자 청년단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몇 해 전 호주선교사집(여황산 자락에 세워진 2층 벽돌 양옥집) 두 채를 지었던 중국인 기술자들을 불러 터를 고르고 기초를 다지기 시작했다.

이 사실을 안 일본경찰은 마침 문화정책을 표방하던 때인지라 직접적인 탄압은 피하고 모금에 대한 방해공작을 끈질기게 펼쳤다.

때마침 많은 사람들이 항일운동 사건에 연루되어 구금되거나 타지로 피신하는 사태가 연달아 일어나면서 모금운동은 지지부진 하게 됐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도 박봉삼, 방정표, 양재원, 박성숙, 양기수, 강진호, 신수동 등 유학생 출신들은 악단 '브라스밴드'을 조직, 시가지를 행진하면서 북치고 나팔 불며 동참을 호소하고 민족의식 고취에 힘을 다했다.

나중에는 방정표가 일본에 가서 활동사진 영사기와 서양영화를 가져와 회관건립기금 모금을 위해 전국을 순회하면서 영화상영을 시작했다.

그들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모금 사정은 좋아지지 않고 착공 3년이 지나도록 완공을 하지 못했다.

이러한 고난의 세월 속에서도 통영청년단은 결코 해체되거나 일을 중단하지 않고 강습소를 열어 충렬사와 동부유치원을 전전하며 배움에 목마른 청소년들에게 신학문과 민족의식을 심어주기 위한 강습을 꾸준히 이어 나갔다.

제3대 단장을 맡은 임철규는 부진한 회관 건축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전심전력했다.

그는 사재를 털어 건축비를 충당하였으나 그래도 부족하자 문중의 전답까지 잡히고 돈을 마련해 기어코 회관건립을 완성해냈다.

드디어 대지 254평에 연건평 120평의 2층 벽돌양옥으로 된 '통영청년단회관'이 3년여의 공사 끝에 마무리 된 것이다.

준공식이 열리던 1923년 11월 18일은 통영군민들의 대(大) 축제일이 됐고 자주독립을 향한 염원은 한층 더 뜨겁게 타 올랐다.

초기에는 일제의 탄압을 피해 주로 순회강연회를 개최, 문화운동을 지역사회에 확산시키는 계몽운동과 교육을 주요사업으로 삼았다. 지육부(智育部)를 두어 청년들을 위한 강습회와 교양강좌를, 아동들에게는 소학교 과정의 야학강습을 열었다.

체육부(體育部)는 우레축구단을 결성하고 축구, 수영, 정구, 씨름, 마라톤, 자전거경주 및 시민대운동회를 여는 등 각종 체육행사를 펼쳤다.

하지만 1927년 통영출신 경남도평의원 김기정의 친일망언을 규탄하는 시위를 주도, 무려 30여 명의 통영청년들이 투옥되기도 했다.

일제는 이러한 청년단 조직을 화해시키기 위해 집요한 사찰과 탄압으로, 결국 1931년 신간회 통영지회와 함께 해산됐다.

통영청년단 회관 또한 본래의 목적과는 달리 일제의 어용단체들이 사용해 왔으며, 일제 말기에는 통영세무서, 동부유치원으로 사용됐다.

일제에 의거 준공허가가 나지 않아 무허가가 방치돼 오다가 1945년 3월 30일 통영청년단 임철규 단장이 통영읍에 기부 체납 했다.

8.15광복과 더불어 통영여자중학교로 사용됐으며, 1959년 통영시(당시 충무시) 소유로 법원 등기가 완료됐다.

이후 충무공예학원, 충무고등공민학교, 도서관, 문화동사무소, 통영문화원으로 각각 사용돼 오다가 현재는 1층 통영사연구회, 서예모임, 충무고등공민학교로 쓰이고 있다.

3.1동지회 이명 사무국장은 "통영청년단 회관 기존 건물 원형을 보존하고 그 취지에 통영항일운동기념관으로 재개관, 항일운동의 전시와 교육시설로 활용하는 것이 가장 적합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특히 3.1운동은 비폭력·비무장 항일정신으로 오늘과 자유민주주의 정신과도 그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시민단체들의 서명이 끝나는 대로 강석주 통영시장과의 면담을 신청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기념관 운영은 독립유공자 후손 모임인 3.1동지회 통영지회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운영할 계획이며, 1층은 통영항일운동의 전개과정과 활동 등을 각종 자료를 통해 전시하고, 2층은 교육실과 자료조사연구실, 사무실 용도로 구성한다는 계획이다.

또 향토사랑과 장학사업에 앞장서는 이를 위한 가칭 '3.1문화상' 제정은 물론 향토사랑 교과과정과도 연계, 3.1운동 교과서 집필 등도 계획 중임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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