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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
그래서 더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이중섭의 통영, 통영만의 콘텐츠 구축 제1과제

기사승인 2018.12.07  13:5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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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이중섭과 창작의 활화산 통영
②예술가들이 본 통영의 이중섭
③제주도에 살아 숨 쉬는 이중섭
④부산 범일동의 이중섭 풍경
⑤위대한 유산 이중섭, 통영은 어떻게 화답할까

 

통영에서 창작된 이중섭 1953년작 '황소'.


"소 한 마리가 묵직한 다리를 움직여 느린 걸음으로 화면 왼쪽을 향해 걸어가고 앞발을 들어 올렸다가 다시 땅을 내디디려는 순간, 고개를 돌려 관객을 쳐다본다. 살이 없이 비쩍 말라 골격을 다 드러냈지만, 육중한 동작으로 강렬한 에너지를 발산한다. 어깨를 치켜 올리고 뿔을 치받으려는 소의 자세는 어떠한 역경도 극복할 수 있다는 단호한 의지와 결단을 느끼게 한다. 몇 번의 붓질만으로는 이처럼 해부학적으로 정확하게 소의 형상을 잡아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마치 서예의 필법을 연상시키는 듯, 강하고 약하고, 굵고 가늘고, 빠르고 느림의 흐름이 소의 형상을 지배한다. 매우 숙련된 서양식 데생의 기초 위에, 동양의 '기운생동'에 이해가 더해졌기에 가능한 표현이다. 이중섭 화업의 절정기 작품으로 평가된다"

1953년 통영에서 탄생한 이중섭의 황소에 대한 국립현대미술관의 평가다.

천재 화가의 짧은 삶 속에서도 이중섭의 예술세계에 있어 통영은 엄청난 안식처이자 창작의 활화산이 됐다.

이중섭이 1950년 12월 국군 철수를 따라 가족들을 거느리고 원산항을 떠나 부산의 피난민 수용소 생활에 이은 제주도 서귀포 생활(봄에서 12월까지)을 거쳐 통영에서 한 겨울을 지냈던 것은 1952-1953년의 일이다.

통영은 유강렬의 권유로 1952년부터 약 2년간 머물면서 많은 작품을 남겼고 4인전, 개인전 등 그의 예술의 혼을 펼쳤던 곳이다.

1954년 봄에 끝나는 이 길지 않는 통영 시절이 이중섭의 예술을 위해서 귀한 시절로 남았다.

이중섭으로부터 데생을 배운 김성수 통영옻칠미술관장, 박종석 화백, 고 전혁림 화백의 증언과 초정 전시회 방명록 등을 통해 보면 이 같은 시간을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이중섭과 초정 김상옥을 함께 교우한 김길상 화백은 정확히 1953-1954년 약 10개월 남짓 통영에 거주했다고 증언했다.

또 이중섭의 개인전은 당시 자유당 청년단장이었던 성림다방 주인 박종학씨 주선으로 성사됐고, 그가 김기섭씨를 이중섭에게 소개했다고 증언했다. 김세윤 전 통영문화원장과의 증언과도 일치하는 부분이다.

이에 대해 오광수 미술평론가와 이중섭미술관 전은자 학예연구사는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았던 이중섭은 제주와 통영, 부산, 대구 등을 전전, 여러 정황을 볼 때 1952년부터 통영과의 교류가 있었고 정착은 1953-1954년 봄으로 볼 수 있다고 정리했다.

하지만 그 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남긴 상당한 부분이 잔잔하고도 아름다운 풍경으로 이름나 있는 통영에서 제작된 사실이다.

통영은 이중섭이 아주 짧은 기간 거주했지만 노을 앞에서 울부짖는 소, 흰소, 황소, 달과 까마귀, 부부, 가족 등 그의 대표작들을 창조해낸 곳이다.

한때 통영시가 미술경매에서 최고가를 기록한 통영풍경 등 이중섭 그림 속 통영풍경을 찾아 관광명소화 하는 사업을 추진하기도 했다.

또 이중섭 거주지와 작품 활동지 등에 미술관 또는 기념관 등을 추진, 테마 관광지로 발전시킨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우기도 했지만 탄생 100년 하고도 2년이 더 지난 지금, 그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이는 단 풍경화 2점만을 남긴 제주도가 연간 28만명의 관람객을 미술관으로 끌어당기고 이중섭을 살아 숨 쉬게 하는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그럼 통영 이중섭의 포인트를 찾는다면 어디를 주목해야 할까.

바로 1951년 8월 10일 전쟁이 한창이던 때 2년제, 정원 40명으로 문을 연 통영시 항남동
241-1번지 엣 경남도립나전칠기기술원 강습소이다.

처음 문을 열 당시는 지금의 문화동 세병관 앞 나전칠기의 대가 김봉룡 선생 생가 인근에 위치해 있었다. 부산 공예협동조합연합회 회원이었던 김영호의 건의로 나전칠기의 고장이자 부산에서 가장 가까운 통영에 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를 건립, 2년제(후에 3년제로 변경)로 출발했다.  

소장은 양성봉 도지사, 부소장은 김봉룡이었다. 1952년 12월 항남동으로 이전, 도립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로 개칭했다. 그 후 당시 통영청년단회관(옛 통영문화원 건물)으로 옮긴 후 다시 남망산 공원으로 신축이전, 폐지됐다.

유강렬이 주임으로 있으면서 김경승, 남관, 박생광, 전혁림, 이중섭에게 침식을 제공했고, 이중섭은 종종 양성소 학생들에게 데생 지도를 하면서 유강렬의 일을 도왔다.

통영시절 이중섭, 우강열, 안선생.


청마 유치환, 초정 김상옥, 대여 김춘수 등과도 교류, 서로에게 그림이 되고 시가 되고 한 시절이었다.

이곳은 현재 염흡 할머니의 소유로 당시의 모습이 거의 그대로 보존돼 있다.  2004년 이중섭 기거했던 곳 표지석이 설치돼 있다. 통영시는 이 건물을 매입, 김봉룡, 유강렬, 이중섭, 장윤성 등의 기념관으로 꾸미고 나전칠기 체험장을 조성할 계획이었으나 쉽지 않은 상황이다.

김성수 통영옻칠미술관장과 동심의 작가 김길상 화백은 "이중섭과 도립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와는 절대 불가분의 관계다. 단순 이중섭의 작품 탄생지가 아니라 통영 400년 역사의 근간인 통영나전칠기의 한 획이다. 도립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라는 이름으로 복원, 그 속에 이중섭이 있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이중섭 신화의 대명사 전은자 서귀포 이중섭미술관 학예연구사 역시 "타도시와 공유하는 이중섭이 아니라 통영만의 이중섭이어야 한다. 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를 중심으로 이중섭이 전시회를 가진 녹음다방과 성림다방을 집중 조명, 스토리텔링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그 속에 교유한 수많은 예술인들의 이야기도 통영만의 콘텐츠"라고 조언했다.

이중섭의 문화가 부흥하기를 염원하는 듕섭다락방과 친구들 게스트하우스 김순효 대표도 "도립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를 제일 핵심으로 두고, 이중섭이 당시 그렸던 작품 속 풍경, 그리고 교유했던 예술가들이 함께 걸었던 길을 연결, 통영근대문화유산의 한 그물로 엮는 작업이 제일 관건"이라고 말한다.

간송미술관 흰소와 수많은 은지화의 원래 소장처였던 김기섭 시장의 술도가와 집(김동욱 전 국회의원·김관욱 전 한산신문 대표이사 자택), 그리고 김 시장은 물론 예술인들과 이중섭이 가주 갔다는 항남동 복자네 집, 그리고 김용주가 인솔한 일본 적산가옥인 아카다마(赤玉) 요정과 하청여관, 술값 대신 그림을 주었던 새미식당, 개인전에 작품이 팔리지 않아 미친 듯이 불태웠던 새미까지 통영만의 이야기는 무궁무진하다. 

난(蘭)이라는 이는 명정明井골에 산다든데/명정골은 산을 넘어 동백나무 푸르른 감로 같은 물이 솟는/명정 샘이 있는 마을인데/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긷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붉게 동백꽃 피는 철엔/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긴 토시 끼고 큰머리 얹고 오불고불 넘엣거리로 가는/여인은 평안도서 오신 듯한데 동백꽃이 피는 철이 그 언제요/옛장수 모신 낡은 사당의 돌층계에 주저앉어서 나는/이 저녁 울듯 울듯 한산도 바다에 뱃사공이 되어가며/녕 낮은 집 담 낮은 집 마당만 높은 집에서 열나흘 달을 업고/손방아만 찧는 내 사람을 생각한다.
<백석의 시 '통영2'>

통영충렬사 풍경.


이중섭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나무들을 바로 곁에 둘러 서 있는 듯이 당겨오고 좀 더 복잡하게 있는 계단 한단을 의도적으로 줄여, 우리의 눈길이 좀 더 편하게 아래의 문을 지나 맨 위에 있는 사당으로 옮아가게 만든 1954년작 '통영 충렬사 풍경'. 시인 백석은 그 충렬사 돌계단에 주저앉아 만나지 못한 난이라는 사랑을 기다리고 있다.
자신의 문체로는 통영의 그 아름다움을 도저히 표현할 수 없다던 당대의 정지용은 청마의 안내로 충렬사 돌계단에서 감개무량 눈물이 질금 솟는다고 표현하고 있다.  

통영읍안 뒷산 밑 명정리(明井里)라는 한적한 동리에서도 뒤로 물러나 예로부터 유명한 일정월정(一井月井) 두개의 우물물이 한곳에서 솟는다. 이를 합하여 명정(明井)이라 이른다. 明井 우물물이 맑고 달기 비와 가물음에 다르지 않고 수량이 풍족하기 읍면을 마시우고도 고금이 일여하다. 우리는 먼저 손을 씻고 이를 가시고 시인 청마 두준 두 벗의 안내로 명정에서 다시 올라 동백꽃 고목이 좌우로 어우러진 길과 석계단을 밟는다. 역대 통제사들의 기념비석이 임립한 충렬사(忠烈祠) 정문에 든다. 한 개의 목공옛품과 같이 소박하고 가난하고 아름다운 중문에 든다. 감개무량이라고 할가. <정지용의 기행문 남해오월점철(南海五月點綴)10-통영(統營)3 중>

비운의 천재화가 이중섭을 비롯 당대 내로라하는 예술인 정지용, 백석 등은 그를 품어준 따뜻한 남쪽나라 통영에 엄청난 선물을 남기고 떠났다.

이중섭의 눈으로 본 20여 점의 통영풍경, 이중섭 개인이 아닌 대한민국 민족의 자존심을 건 통영산 창작물 황소와 흰소의 연작 시리즈, 60여 년 전 통영의 우정에 화답한 또 하나의 위대한 유산 이중섭, 통영은 과연 어떻게 화답할까.

이중섭은 우리 근대문화유산인 나전칠기와 공예, 통영문화협회 회원들과의 우정, 통영이라는 도시 속 깊은 역사로 살아 숨 쉬고 있다. 다만 그것을 구슬로 꿰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통영만의 콘텐츠로 이중섭스토리를 연결하고 새로운 문화상품으로 발굴하는 것이 그 답이다.<끝>

이중섭은 그 당대 예술인들과 많은 교유를 했다. 통영르네상스라고 불리는 1945년 통영문화협회를 이끌었던 유치환, 김춘수, 김상옥, 전혁림 등의 예술인들과도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1945년 10월 통영문화협회 야유회 사진을 에이블그래픽 박우권 대표(통영예술의향기 회장)이 청동주물로 입체화 한 작품이다. 위 왼쪽부터 하태암(화가), 박재성(연극), 최상한(음악), 김춘수(시인), 윤이상(음악), 배종혁(시인). 그리고 아래 왼쪽부터 정윤주(음악), 옥치정(문인), 김용오(국어), 유치환(시인), 전혁림(화가), 정명윤(문화운동).

김영화 기자 dal3117@naver.com

<저작권자 © 한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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