晩亮 陳邦植 (만량 진방식) <(재) 한산대첩기념사업회 이사>

 

세계 곳곳에서 분출하고 있는 테러와 핵위협, 자연파괴 과학의 진향 방향 등은 인류가 멸망의 벼랑에 서있음을 시사한다. 19세기가 서구세력에 의한 동아시아 침략의 역사였다면, 21세기는 그에 대한 역습으로 막을 열었다. 숙명의 본질을 파헤치기 위해 민족적 집단 무의식의 구조에 초점을 두고 역사의 미래를 하나로 묶는 복안적 시각으로 분석해 본다.

4차 산업혁명에 돌입한 지적 영역은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구별 없이 하나의 학문(science)으로 융합되어 간다.

이 글은 구조주의적 역사관인 원형사관(ethno core) - 불교의 ‘업’ 카오스 이론의 ‘자기조직화’, 노장사상의 ‘도(道)’와 철학적 개념을 공유하는 현실적 지혜이다.

한국역사가 ‘촛불혁명· 6.13 지방선거’로 세계사의 중심에서 새롭게 갓 시작되었다.

열전도 냉전도 아닌 北․美간의 새로운 전쟁개념인 온전(溫戰)의 구조가 나타났다.

북한 핵위협을 간파한 키신저의 예측처럼 “핵무기는 더 이상 무기가 아닌 외교수단(『핵무기와 외교』)이다. 그렇다. 北은 핵보유에 성공한 후 美의 압력을 받아왔지만 몇배의 대가를 기대할 수 있는 입장이다.

논개적 사고-‘나 죽고 너 죽자’이다.

현재 진행 중인 역사의 역습은 원형의 충돌로 발생하고 있다.

원형(原型)은 민족 또는 집단이 지닌 독특한 성격으로 민족문화를 형성하고 역사의 전개양식을 직접 연출하는 가치체계이다.

민족은 원형과 환경이 되먹임하며 언어와 역사를 발전시켜온 생명체이다. 민족의 원형분석은 개인에 관한 정신분석적 작업을 민족차원으로 확대한 거과 크게 다르지 않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본질을 성(性)에 대한 욕망(libido)에 두고 그로인해 발생한 갈등이 꿈으로 나타나고 정신병으로 진행하는 것으로 보았다. 유아기에 받은 성적충격이 콤플랙스가 되어 무의식 속에 깊이 숨어 정신병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여기서의 원형은 이데아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의 산물, 즉 공동체의 역사를 반영한 집단무의식이며 생명체처럼 변화해온 것이다. 즉 민족의 집합적 경험의 결과이다.

개인이 업을 씻고 깨우침을 얻는 것과 같이, 민족도 원형 승화를 통한 비약이 가능하다.

원형사관은 原型을 역사의 축으로 하여 역사현상을 파악하는 민족차원의 정신분석이다.

일본의 원형은 우두머리에 대해 ‘두려워하고(可畏)=슬기롭게 모시고(賢)=무서워하는 것(恐)’이었다. 이 셋이 일체화된 것이 일본의 원형이다. 八紘一宇를 내세워 우두머리를 중심으로 국가 정책에 순종하고 ‘부국강병’을 목표로 국민들이 뭉치도록 했다.

순종에서 뭉치고 참아낸 에너지를 전쟁으로 폭발시켰다. 그래서 청일전쟁 노일전쟁, 진주만 폭격으로 시작된 미일전쟁에서 일본은 늘 선전포고 없이 기습전을 감행할 수 있었다.

근대화가 시작되자 일본은 단숨에 13개 섬을 자국영토로 귀속시켰다. 1873년에는 淸이 서구제국주의에 시달리는 틈을 이용해 淸의 조공국이던 류구(琉球) 왕국을 재빨리 일본에 편입시켰다. 이름도 ‘오끼나와’현으로 바꿔 버렸다. 일본근해의 오가사와라(1878년) 섬과 치시마(1875년) 센가쿠열도(1895년) 독도(1905년) 오키노시마 등도 자국영토로 가져갔다.

특히 오가사라와(小笠原)섬은 미국도 넘보고 있었으나 일본이 한발 앞서 편입시켜 버렸다.

이것들이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역사이다.

그 틈에 우리는 독도를 도둑 맞았다. 우리의 국가 원리인 홍익인간(弘益人間)이 일본의 팔굉일우(八紘一宇) 앞에 얼마나 무력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일본은 심지어 하와이 제도까지 목표로 삼았다. 천황가는 하와이 왕가와 혼인을 맺으며 하와이를 차지하려 했다. 그러나 미국이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결국 1905년 ‘가쓰라(桂)-테프트(Taft) 밀약으로 美는 필리핀을 갖고 日은 조선을 식민지화했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 1886년 이후 불과 37년만이다.

신라통일은 660년이 아니라 663년 백강전투(백제와 倭연합군 VS 나당연합군)에서 나당의 승리로 삼국통일이 되었다. 고구려 영토 대부분을 포기하고 백제 옛 영토만 간신히 마무리되었다. 영토는 넓었지만 수도는 여전히 경주에 두었다.

신라인과 백제인의 관계는 점령자와 피정복민의 상하 구조로 변했다.

백제에 대한 차별의식은 훗날 신라왕통의 계승자로 자처한 고려태조의 「훈요 10조」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구 백제 땅은 반역의 땅으로 지목되었다. 백제인의 반항정신은 조선시대 정여립의 난, 동학농민혁명 그리고 5.18 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졌다. 차별에 대한 반항은 물리학의 작용과 반작용과 같이 면면이 원형에 새겨진다.

고구려 유민도 차별의 대상이 된 것은 마찬가지였다. 定州는 전국에서 두 번째로 과거 시험 합격자를 배출했지만 조선 500년 동안 평안도민은 문무관을 막론하고 중용되지 않았다.

역사를 무시함으로써 망각으로 유도할 수는 있어도 집단무의식에는 한(恨)으로 남는다.

안타깝게도 ‘自願事大國’이된 신라(김유신)는 당(唐)을 중심으로 원심력이 작용했다.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옛 지역민을 품지 않았다. 차별했다. 신라의 자원사대는 그 후 1250년간 한반도의 국시가 되어 원심분리기처럼 작동했고 해방 후에는 남북 분단과 유신정권(박정희:일천황에 충성맹세 혈서) 간도 특설대(백선엽, 정일권 등)에서 독립군 토벌, 지역감정을 유발 악용했다.

매우 안타깝지만 신라의 원심력이 일본의 야마토(大和)정신의 구심력에 눌려 식민지가 된 것은 천추의 한(恨)이다.

‘촛불혁명’의 함성은 1456년간 기승을 부린 김유신의 自願事大主義를 거부, 자주외교 국방을 선언했고 ‘6.13지방선거’는 그간 한국 지배 계급의 근거지를 초토화했다.

晩亮 陳邦植 (만량 진방식) <(재) 한산대첩기념사업회 이사>
저작권자 © 한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