꽁꽁 얼었던 겨울이 물러나는 3월은 잊었던 민족혼을 되새기는 때이기도 하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분연히 일어나 피와 눈물과 땀으로 이 나라, 이 겨레를 지켰던 분들을 떠올려본다.
광복으로부터 6.25 전쟁까지 이어진 혼돈의 세월, 나라의 앞날을 일구다 눈물방울로 흩어진 이들이 수없이 많다. 대한민국은 백범 김구 선생을 잃었고, 통영은 국한 김철호 선생을 잃었다. 이후 대한의 역사는 국민들의 뜻과는 무관하게 흘러갔다.

김철호 선생은 반민족행위자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경남 부위원장이자 조사관으로 활동하다 6.25 전쟁이 발발한 해에 실종,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향 통영에서 벌어진 일이다.

김철호 선생은 1901년 통영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5세에 중국으로 건너가 광둥 중산대학에서 수학한다. 여기서 김성숙, 장지락 등과 함께 공부하는데, 장지락이 바로 미국의 여류작가 님 웨일스가 쓴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이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아리랑>을 읽고서 조선에 대해 제대로 알게 되었다며 님 웨일스에게 감사의 편지를 쓰기도 했다.

중산대학 재학 시절, 선생은 이미 의열단 단원으로 활약하였다. 조선총독부 고위 관료와 일본군 장성, 매국 친일파 척결을 임무로 했던 의열단은 영화 "밀정"을 통해 우리에게 널리 알려졌다. 일제가 임시정부 수반이었던 김구 선생보다 더 많은 현상금을 의열단장이었던 김원봉 선생에게 걸었던 걸 생각하면, 독립운동사에서 의열단이 차지하는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김철호 선생은 의열단 선전출판부 책임자였으며, 1929년 국내에 잠입하여 활동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나라의 땀방울이 되기를 소망했던 김철호 선생은 호를 국한(國汗)이라 하였다. 독립과 건국을 향한 선생의 간절한 염원을 읽을 수 있다.

정부 수립 후 경찰서장 자리까지 제의받았지만 "해방이 됐는데 왜 내가 조선사람들을 잡아 가두는 일을 해야 하느냐"며 고사했다. 그러다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반민특위 활동에 앙심을 품었던 친일세력들에 의해 통영 앞바다에 수장된 것으로 전해진다.

그날 선생의 염원은 한 방울의 눈물로 맺혔으리라. 통영 앞바다에 떨구어진 선생의 눈물방울은 해류를 따라 태평양으로 흘러갔을 것이고, 대한의 선단을 이끄는 통영 청년들의 땀방울을 만나 오대양을 누비며 해양강국의 터를 닦았을 것이다.

김철호 선생처럼 통영 출신으로서 3.1 운동과 국내 항일, 국외 독립운동을 통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은 훈포상자는 모두 65명에 이른다. 민족의 얼을 세우고, 나라의 근본을 닦은 3월 1일, 숭고한 임들의 은덕에 고개 숙여 절한다.

저자 주. 사진은 중국 중산대학에서 공부하던 시절, 의열단 동료였던 서응호와 함께 찍은 모습이다. 앉은 이가 김철호 선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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