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고성군 18주기 추모식'…가짐 없는 큰 자유' 정신 되새겨

"편안하기 위해서, 잘 살기 위해서, 윤택해지기 위해서 공동체 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미친 짓이다. 한 집에서 완전히 열어놓고 산다는 것은 아픔과 불편함, 속상함과 어려움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참 인간'이 되기 위한 용광로이다"

도시빈민을 위해 일생을 바친 '빈민의 대부' 고 제정구 선생의 19주기 추모식이 지난 3일 고성군 대가면 척정리 제정구 선생의 묘소에서 열렸다.

이날 추모식에는 김부겸 행정안전부장관, 박종훈 경상남도 교육감, 이향래 고성군수 권한대행,
황보길 고성군의회 의장을 비롯한 유가족과 추모객 등 150여 명이 참석했다.

제정구 기념사업 원혜영 이사장, 고성기념사업회 이진만 회장이 초헌, 참가인사·참가단체에서 아헌, 유가족이 종헌을 맡았다.

추모식은 내빈 소개와 추모객들의 참배에 이어 제정구 선생을 기리는 인사 순서로 진행됐다.
이번 추모행사와 함께 (사)제정구기념사업회는 고성군 일원에서 추모기행을 가졌으며, 제정구 선생의 '가짐 없는 큰 자유'라는 정신을 되새기는 시간을 보냈다.

또 고성오광대전수관에서 고성오광대와 시흥시립예술단의 특별공연을 관람하며 선생의 뜻을 기렸다.

제정구 선생은 1944년 고성군 대가면 척정리 척곡마을에서 태어나 고성 대흥초등학교, 고성중학교를 졸업하고 1962년 진주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66년 서울대학교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선생은 1972년부터 서울 청계천 판자촌에서 도시빈민운동을 시작했다. 1977년에는 정일우 신부, 양천동 철거민들과 경기도 시흥군 소래면 신천리로 이주, 빈민공동체인 '복음자리 마을'을 건설했다.

이어 1979년 시흥동 등의 철거민들과 함께 '한독마을'을 지어 신·구교 공동기구였던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 도시주민분과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1984년 빈민운동의 대표자격으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중앙위원으로 민주화투쟁에 참여했다.

1985년 3월, '천주교도시빈민사목협의회'(뒤에 천주교도시빈민회로 개칭)를 창립해 초대 회장으로, 그리고 11월에는'천주교사회운동협의회' 의장으로 활동했다.

이와 같은 활동에 따라 1986년 2월에는 정일우 신부와 함께 필리핀 정부가 수여하는 '막사이사이상' 지역사회지도 부문을 수상했다.

또한, 1987년에는 판자촌 강제철거 반대투쟁을 전개하면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공동대표를 맡아 6·10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다.

1988년에는 태국 방콕에서 발족한 '민중주거쟁취 아시아연합(Asian Coalition for Housing Rights)'에 정일우 신부와 함께 한국대표로 참가하기도 했다.

1989년에는 '아시아 도시빈민대회'를 서울에서 개최했으며, 1991년에는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연합 사무총장을 맡았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 민주당의 공천(경기도 시흥·군포 선거구)으로 출마해 당선됐고,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통합민주당)에서 재선했다.

1997년 대통령 선거 때 통합민주당과 신한국당의 합당으로 한나라당에 합류해 활동했다.

1999년 사망한 뒤 민주화와 도시빈민을 위해 투쟁해 온 공적을 인정받아 정부로부터 국민훈장모란장을 추서 받았다.

고성군은 2017년 3월 고성인물로 빈민운동가 제정구 선생을 선정하고 선생의 생가정비와 안내표지판을 설치하는 등 제정구 선생 선양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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