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이 머물던 1954년, 통영예술아트센터 성림다방과 녹음다방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녹음다방 4인전 중의 이중섭

1945년 광복의 기쁨도 잠시, 1950년 6.25 전쟁의 상처에서 회복되기 시작한 지 겨우 1년이 지난 1954년은 문화르네상스 시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년 후인 1955년 통영읍에서 충무시로 승격할 당시 인구수가 6만1천236명. 가구수 1만1천82가구로 1가구당 평균 5.5명의 가족이 함께 살았다고 기록에 남아있다.

1953∼4년 통영 최고의 예술센터를 손꼽으라면 단연 다방이다.

그 당시 당대 예술인이 가장 많이 찾았던 3개의 대표 다방이 있다. 청마 유치환을 비롯 통영최초의 사진전이 열린 녹음다방(통영시 중앙동우체국 맞은편 호심다방의 전신)과 마돈나다방(현 통영적십자병원 인근), 그리고 이중섭이 개인전을 연 성림다방(항남동 우리은행 건너편 현 올포유 건물)에서는 이중섭 양달석 박생광 등 전시회가 봇물을 이뤘다.

당대 예술인들이 가장 좋아한 핫플레이스 '녹음다방'

이영도 형부 엄주수 운영, 예술 아지터
유강렬, 이중섭, 장윤성, 전혁림 4인전


1954년 통영 최초의 예술사진전이 열린 곳은 녹음다방(綠陰·당시는 공식 기록에는 록음이라고도 많이 썼다)이 당대 예술인들이 가장 선호한 핫플레이스였다. 

현 통영시 중앙동우체국 맞은편 호심다방의 전신이었던 이 녹음다방은 통영문화예술사 한 페이지를 기록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지두호 통영읍장의 아들이었던 지영대 불박사와 이영준 통영시립박물관장은 녹음다방은 청마 유치환과 5천여 통의 연서를 주고받던 이영도 시조시인의 형부 엄설정(본명 엄주수)씨가 운영한 클래식 전문 다방이었다고 회상했다.

결핵으로 남편을 잃은 이영도 시조시인은 1946년 대구에서 해방이후 최초의 시동인지 '죽순'에서 유치환과 만난다. 통영여중 교사로 발령받은 이영도는 남편을 잃은 슬픔을 안고 언니의 집인 엄설정씨 집에 머무르게 된다.

청마 역시 만주 생활을 끝내고 통영에서 같은 학교 교편을 잡던 시절, 청마는 숱한 애정의 시를 보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은 그 기다림 때문에 행복하다. 우체국의 유리문이 여닫힐 때마다 파란 하늘과 함께 통영의 갯비린내가 밀려왔을 것이다. 아마도 유치환 시인은 거기에서 누군가에게 편지를 띄우고 한참 동안 앉아 있었는지도 모른다.

"쉬이 잊으리라/그러나 쉬이 잊히지 않으리라" 그의 가슴 속에 남아 있는 '연정의 조각'은 가슴을 저미는 쓰라림으로 그의 폐부를 찔렀다.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마음의 어룽"은 명편의 시 '행복'으로 남았다.

왼쪽부터 이중섭 전혁림 장윤성 유강렬


전혁림 화백의 생전 증언에 따르면 1954년 전보다는 앞, 증언 당시 1952년쯤이라고 회상했다. 유강렬, 이중섭, 장윤성, 전력림이 4인회를 조직, 녹음다방에서 4인전을 개최했다고 한다.

이때 전시된 작품이 '분노한 소'와 통영풍경이었다고 회상했다. 그 당시 이중섭이 자신의 그림 앞에서 찍은 사진이 지금도 남아 있다.

충무시 승격 1년 전인 1954년 8월   18∼24일 녹음다방에서는 광복 9주년 통영 최초의 예술사진전이 열렸다.

통영 류완영, 삼천포 허종배, 사천 윤응렬, 신종철, 박석규, 진주 박근식 6명의 작가가 22점의 예술작품을 전시했다. 초정 김상옥 시인이 회장인 문총통영군지부에서 초청해 성사됐다.

녹음이라는 한자 상호가 뚜렷하게 보이고 전시회가 열리는 다방 내부 모습도 사진을 통해 보면 자세히 보인다. 이 전시회에 참가하고 있는 류완영 사진작가는 이듬해 충무시 승격 1955년에 초대 개인전을 열고, 개청 2년에는 인물 사진전을 열어 통영의 문화사가 살아 숨 쉬는 방명록 3권을 고스란히 남긴 주인공이기도 하다.

1954년 통영 최초의 사진전이 열린 녹음다방에는 청마 외에도 그 당시 정치인과 예술인, 지역유지들이 대거 출입했고, 녹음다방 주인 엄설정씨 역시 방명록에 자신의 이름을 적어놓았다.

그 최초의 사진전은 3장의 사진과 방명록으로 남았다. 녹음다방 앞에서 작가 6명과 문총 회장이었던 초정 김상옥 시인과의 기념촬영, 작가들이 전시회를 알리는 포스터 앞에서 찍은 사진, 그리고 전시회 내부 사진 등이 남아 있다.

녹음이라는 다방 상호는 물론 다방의 외관과 내부 모습도 선명하게 남았고, 초정이 만든 방명록에는 청년화가 전혁림을 시작으로 "렌즈에 피가 흘렀도다"고 쓴 김춘수 시인 등 문화계와 정치계 각계각층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았다.

통영시절 왼쪽부터 이중섭 유강렬 안선생


이중섭 친구들이 추천, 개인전 가진 성림다방

통영의 행복한 삶, 그림 40여 점 전시
유치환, 김춘수…이중섭 시 탄생 


1954년 항남동 성림다방에서도 뜻 깊은 전시회가 열린다.

제주도 서귀포 생활을 거쳐 통영에서 겨울을 지냈던 이중섭이 한 해 전. 그리움이 사무쳐 선원증으로 건너간 일본에서의 일주일이 아내와 아이들과의 마지막 만남이었고 돌아온 이중섭은 가족이 있는 일본과 가까운 통영으로 이사해 왔다.

통영의 나전칠기 기술원 양성소 교육 책임자로 있던 공예 미술가 유강렬의 권유가 이중섭에게 모처럼의 생산적인 한 계절의 시간을 선사했던 것이다.

그는 유강렬이 제공하는 침식(항남동 구보건소 옆 빕스 건물)에 기대어 오랜 만에 그림에 정신을 집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또 가슴 아픈 허전함을 이중섭은 새로 맞이하는 통영의 풍경으로 달래면서 그림에 열중했다.

그 해 바로 '노을 앞에서 울부짖는 소'와 그 유명한 '흰소'가 탄생했다.

그의 '황소' '부부' '가족' '달과 까마귀' '도원'같은 대표작들도 모두 통영 시절의 작품이다.

겨울이 지나자 통영 일원 나들이를 즐기며 풍경화 제작에 몰두해 '푸른 언덕' '남망산 오르는 길이 보이는 풍경' '충렬사 풍경' '복사꽃이 핀 마을' 등 가작을 남기기도 했다.

친구들의 권고를 받아들인 이중섭은 항남동 성림다방에서 40여 점의 작품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이때 전시장을 찾은 여섯 살 위 청마의 눈길은 뜻밖에도 이색적인 '달과 까마귀'에 쏠렸다.

성림다방 이층에서 이루어진 두 사람의 이름 없는 만남이 이중섭 사후 11년 만에 '怪變-이중섭李仲燮 화畵 달과 까마귀에'(현대문학, 1967년 2월호)라는 한 편의 시로 영글게 됐다.

꽃의 시인 대여 김춘수도 '이중섭'을 노래했다.

한편 1950년대 현 적십자 병원 인근의 마돈나 다방에서는 진주 박생광 화백과 거제출신 소의 화가 양달석 화백의 전시회가 주로 열렸다고 한다.

이영준 통영시립박물관장은 "당시 다방은 현재의 아트센터 역할을 했다. 예술가들은 물론 지역유지들이 대거 느나들었고, 각종 전시회가 열리는 유일한 문화공간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세상을 떠난 지영대 불박사 생전 한산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 "읍장이셨던 아버지는 물론 지역유지들과 예술가들이 다방에서 자주 모였다. 녹음다방은 그 당시 클래식 음악전문 다방이라 불릴 만큼 음악도 매일 매일 틀어주곤 했었다. 성림다방 역시 각종 전시회도 열리고 그시절 다방은 참 재미난 곳이었다. 중학교 때 아버지를 따라 다방에서 열린 전시회를 관람하고 당당히 방명록에 느낌을 기록하게도 했다"고 증언했다.

1950년대 통영운하 전경(류완영 作)
1950년대 남망산에서 본 통영항 전경(류완영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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