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대도 조개무지를 찾아 나선 날, 찬바람 맞으며 맞닥뜨린 황당함은 어처구니없는 역사의 단절이었다. 그러나 눈앞의 시련은 배고픔이었다.

아침 일찍 급히 표를 끊고 배에 오르느라 충무김밥 사는 걸 깜빡 해버렸다. 보나 마나 섬이 작아 식당도 가게도 없을 텐데, 간식으로 챙겨온 토마토 한 개와 보온병에 담아온 커피만으로 섬에서 하루를 보내려니 깜깜했다.

상리마을을 맴돌며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조개무지 터를 묻는 동안, 내 안에는 하나의 질문이 더 있었다. 어디서 점심을 해결할 수 있을까?

이런 마음 알 리 없는 중ㆍ노년의 남자 사람들의 말끝은 무척 짧았다. 뒷말을 보탤 배짱이 없었다. 휑뎅그렁한 바람만 굴러다니는 골목에서 개들의 놀란 경계음에 등 떠밀려 고개 너머 산등마을에 도착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지만, 빼어난 풍경과 아슬한 조개무지 덕에 배고픔을 잊었다.

감탄과 안타까움, 끝없이 이어지는 상상으로 속을 가득 채우고 돌아서는 길에 드디어 여자 사람을 만났다. 탄항 가는 산길을 묻고 돌아서다 혹시 먹다 남은 고구마라도 있느냐 여쭈었다. 배고픔이 아니라 마지막 허허로움이었다.

작은 주방에 끌어다 앉히고 차려주신 밥상은 단출하지만, 꽉 찬 섬 밥상이었다.

섬 밭에서 캔 작고 못생긴 고구마를 달게 먹고 있으니, 아침의 온기가 남아 있는 밥에 김치와 고추 멸치 장조림, 그리고 통멸치와 묵은지 조림을 곁들여 내어주셨다.

아주머닌 찬이 없음을 연신 걱정하지만, 정작 길꾼은 아름다운 밥상에 행복해마지 않는다. 쌀을 제외하곤 모두 시린 바다에서, 가파른 밭에서 온몸으로 직접 캐낸 것들이다. 어느 것 하나 쉽게 돈 주고 산 게 없는데, 너무 쉽게 먹는 것 같아 송구한 맘이 든다.

물도 넉넉지 않다. 욕지도에서 배로 싣고 온 물을 마을 뒷산 물탱크에 저장했다가 5일에 한 번씩 내려준다. 오늘은 밭일하느라 물 때를 놓쳤는데, 다행히도 예전부터 쓰던 샘이 있어 걱정은 없으시단다.

귀한 샘물로 끓인 커피 한 잔으로 입가심을 하고 나니, 배 시각이 바쁘다며 등 떠밀어 일으켜 세우신다. 좁은 마당을 에워싼 돌담을 돌아 나오는데, 붉은 홍시 하나를 건네주신다.

완만한 산길을 되짚어오며 홍시를 요리조리 살펴본다.

세월이랄 것도 없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홍시 하나가 먼 훗날 역사를 전해주지 않을까. 쪽빛 바다 마주 앉은 작은 언덕에 홍시가 맺힌 사연이며, 홍시를 따내린 볕 좋은 날의 이야기며, 홍시를 길꾼과 나눈 이야기며, 조심스레 받쳐 들고 섬길 걷던 이야기며, 섬 이야기를 읽으며 떠오를 무수한 상념들. 모두 이야기가 되고 섬 삶의 역사가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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