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도면 대촌마을에 있는 시인 최정규 선생 댁에 가끔 들르곤 한다.

정갈한 시인 부부가 가꾸는, 아니 함께 데리고 사는 집의 매력 때문이다.

길에서 집으로 객을 데리고 가는 돌담의 정겨움, 빛바랜 장독대 옆에 헌칠하게 서 있는 감나무, 신비로운 빛 속으로 아득히 빨아들여 세속을 잠시 잊어버리게 하는 산수국, 처마에 매달린 풍경의 은은한 소리….

이 집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 집의 이상형에 발을 디뎠다는 느낌이 들었다.

집은 이래야 한다, 라고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집의 모습. 어쩌면 내 마음속에 굳게 자리 잡고 있는 집의 이데아(idea)가, 자신의 모습이 완전히 투영된 형상(eidos)을 만난 것 같았다.

살면서 이런 순간을 만날 때마다, 산다는 것이 어린 시절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튀어 봤자 부처님 손바닥 안이라고들 하지만, 튀어 봤자 어린 시절의 손바닥 안이다.

시인 부부가 사는 집에 내가 첫눈에 반한 이유는 어린 시절 내가 살았던 '그 집'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 집에는 두 아름이 넘는 무화과나무가 장독대를 덮고 있었다.

여름에는 한 아름이 넘는 가지에 호스를 걸어두고 바다에서 묻은 소금을 씻어냈고, 코끼리 귀만 한 이파리 사이사이 늘 무화과가 입이 쩍 벌어진 채 숨어 있었다. 아랫방 천장 베니어판 위로는 쥐들이 양철지붕을 두들기는 우박처럼 뛰어 다녔고, 마당에서 바라보는 밤하늘은 만개한 메밀꽃 가득한 밭이었다.

소들이 집 안에 살았고, 눈이 부리부리한 닭이 낳은 따뜻한 달걀을 아침마다 날 것으로 먹었다. 축축한 곳에서는 묵은 전설처럼 지네가 기어 나왔고, 반질반질한 몽돌로 둘러놓은 꽃밭에는 색색 소국(小菊)들이 환하게 피었다. 매달 제사 때마다 어머니가 마당에서 부치는 지짐 냄새에 집의 식욕이 한껏 부풀어 올랐다. 

아파트가 현대적 공간이라면, 그 집은 '신화'의 공간이었다. 아파트가 '사람' 중심, 그것도 부부와 그들이 거느린 아이들 중심의 공간이라면, 그 집은 '뭇 생명' 중심의 공간이었다.

사람과 동물들, 식물들, 심지어 죽은 사람까지도 제사 때마다 들르곤 하는 대문도 울타리도 없는 공간이었다. 아파트가 독성의 시멘트로 경계 지어진 싸늘한 '직선'의 공간이라면, 그 집은 흙의 경계마저 허물어진 부드러운 '곡선'의 공간이었다. 지붕에까지 푸른 것들이 쉴 새 없이 깃들여 자라는 곡선의 '품'이었다.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흙으로 바람벽 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그 집은 미당(未堂)의 시 속으로 들어가 "흙으로 바람벽 한" 채 서 있기도 했고, 

밤이 깊어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르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웃간 한 방을 잡고 조아질하고 쌈방이 굴리고 바리깨돌림하고
백석(白石)의 시 속으로 들어가 즐거운 명절의 무대가 되어 주기도 했다. 그 집의 중매가 없었다면, 미당과 백석의 시편들은 맛이 반감된 채 다가왔을 것이다. 

목발 짚은 평상에는 밤마다
순도 높은 어둠이 마실 온다

별자리를 데리고 바람을 데리고 마실 와
깊은 가을처럼 숙성된 오미자술도 마시고
달도 삶아 먹고 놀다가

무당 옷 걸친 눈 부리부리한 수탉이 울면
다시 산속으로 돌아간다
하품하는 귀신들과 어깨동무하고 돌아간다

찬물에 세수하고 나무 베개 베고 살아도
그 누구도 신하 삼을 수 없는 마음이 있다

마름질하지 않은 통나무 같은
길들지 않는 갈기 같은
섬 한 채

미당과 백석의 시들 속에서 노는 게 지겨웠던지, 그 집은 나의 시 속으로 들어와 별과 바람을 불러 오미자술 마시고 놀기도 한다.
물론, 그 집은 이미 세월에 허물어졌다. 하지만 그 집에서 보낸 시간은 내 마음속에 단단한 집을 지어놓았다. 쉽게 길들지 않는 갈기를 가진 집 한 채를. 최정규 선생 댁에 첫발을 디뎠을 때 마음에 일어난 파문은, 내 마음속 그 집이 아직도 단단히 서 있다는 반증이었던 것이다.

* 인용한 시는 순서대로 서정주의 '자화상', 백석의 '여우난골족', 필자의 '시골집' 중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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