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도와 미륵도 사이를 미끄러지듯 지난다. 힘차게 달려오던 배는 속도를 늦췄다. 노도 노꾼들의 마음을 아는 걸까, 삐거덕대던 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소매물도 앞바다까지 멀리 순찰을 다녀오는 길, 격군에 앞서 노가 먼저 지친 기색이다.

공주섬을 지나니 드디어 통제영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인다. 경상 전라 충청 삼도 수군의 총사령 본부이자 남해안 방어의 주축인 삼도수군통제영이다.

여황산 높이 우뚝 솟은 북포루가 맨 먼저 눈에 띈다. 가물거리긴 하지만 수병들이 경계하는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그 아래로 통제영의 중심이자 임금의 상징인 세병관이 우람하게 서 있다. 회칠한 용마루가 햇살에 하얗게 반짝이며 위엄을 뽐내고 있다.

세병관 아래로 촘촘하게 들어선 관아들 지붕이 보인다. 이 모든 지붕은 해안선을 따라 굳게 선 성벽 덕에 안온한 모습이다. 서녘 햇살에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한다.

성벽은 강건하다. 해안선을 따라 일직선으로 펼쳐진 성벽은 좌측 언덕을 타고 올라 서포루를 에돌아 여황산 북포루까지 이어진다. 반대편 동쪽으로도 단단한 성벽은 능선을 날렵하게 타고 올라 동피랑에서 방향을 바꾸어 북포루를 향해서 힘차게 치솟아 오른다.

이토록 단단하고 믿음직스러운 성이 있을까? 왜적으로부터 바다를 지키는 건 수군이지만, 수군을 지키는 건 견고한 진영이다. 물샐 틈 없는 견고함으로 통영성은 오늘도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다.

드디어 수책 앞에 이르렀다. 오른쪽 남망산과 바다 건너 언덕 사이의 물길을 목책이 막아섰다. 동파수와 서파수가 나란히 마주 서서 진입하는 전선만이 아니라 인근을 지나는 모든 것을 준엄하게 감시하고 있다.

창공을 제 맘껏 비상하던 갈매기들도 파수대 곁을 지날 때는 날개의 퍼덕임을 줄여서 미끄러지듯 활공한다. 안이든 밖이든 제 세상에서는 깜냥껏 운신해도 되지만, 경계와 언저리에서는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 갈매기들은 수 없는 경험을 통해 경계를 지나는 의미를 무겁게 알고 있다.

일찌감치 깃발 신호를 받아 수책은 이미 활짝 열려 있다. 수군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이쪽을 응시하고 섰다. 아무리 아군이라 하더라도 경계를 늦출 순 없다. 평소 친분 있는 수병들의 모습도 보이지만, 경계 소임을 맡으면 함부로 아는 체를 할 수 없다. 삼엄한 얼굴로 눈빛을 교환할 뿐이다.

배는 미끄러지듯 항 내로 접어든다. 배는 노의 힘이 아니라 강구안이 끌어당기는 힘으로 저절로 나아간다.

강구는 천하의 요새이자 군항이다. 오목한 항아리 모양이라 앞바다에서는 쉬 보이지 않는다.

욕지 거제 한산 미륵을 비롯한 크고 작은 섬들이 겹겹이 에워싸고 있어, 통영의 안 바다는 사시사철 호수같이 맑은 얼굴이다. 그 속에 들앉은 강구는 방바닥이다.

* 저자 주. 이 글은 한국해양소년단 경남남부연맹 조경웅 국장님과 나눈 얘기를 토대로 통제영 당시의 모습을 가상으로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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