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개신교 최초로 통영에 가장 먼저 발을 디딘 사람은 누구일까?

▲ 호주선교사 하면 통영교육과는 불가분의 관계다. 무어 선교사와 왓슨 선교사 부부가 1911년 11월 통영 최초의 유치원인 진명유치원을 설립했다. 이어 1914년 1월 15일에는 학생 18명으로 진명여학교가 개교한다. 사진은 진명유치원 졸업식의 한 장면.
▲ 통영 최초의 호주 선교사는 1894년 첫발을 통영에 내딛은 무어 선교사 였다. 1894년부터 9년간 통영을 방문, 1913년 왓슨 선교사 부부와 함께 통영선교부를 개설한 인물이다. 독신으로 25년간 통영에 젊음을 바쳤다. 사진은 1910년 동래행 기차에서 호주선교사들이 기념 촬영한 모습이다. 왼쪽부터 맥켄지 목사, 메리 켈살 양, 통영 최초의 호주선교사 무어 양, J.G 데이비스 부인, M.S 데이비스 양, 엥겔(왕길지) 목사.

대의를 위해 누군가는 가야할 길이고 해야 할 일이지만 아무도 가지 않고 하지 않는 일을 하고자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을 일컬어 우리는 개척자 또는 선구자라 한다.

역사는 이러한 개척자나 선구자에 의해 움직여 나아가고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다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고독과 외로움 그리고 극단에는 죽음까지 각오를 해야 했다.

1900년대 초반 우리에게는 내부적으로 형성된 선구자와 외부적으로 형성된 개척자가 있었다. 하나는 우리 스스로 일어나 일제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활동한 선구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의 근대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서양선교사들로서 개척자들이다.

이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고유한 자유와 평안한 삶을 스스로 포기하고 고난과 희생의 길을 걸어갔던 사람들이다. 아무도 그들을 알아주지 못한다 해도 역사는 그들에게 후한 점수를 주고 있으며 그들의 숭고한 희생적 삶을 가장 잘 기억해 주는 유일한 친구가 되고 있다.

그럼 개척자로서의 호주 선교사들 중 통영에 가장 먼저 발을 디딘 사람은 누구일까?

1894년 무어(Elizabeth S. Moore, 한국이름 모이리사백)가 정기적으로 통영을 방문하기 시작한 것이 우리지역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로 기록되고 있다.

무어는 호주 빅토리아 주 윔배트 힐(Wimbat Hill)의 데일레스포드(Daylesford) 출신으로 장로교 여전도 연합회의 파송을 받고 1892년 8월 부산에 도착, 1894년부터 통영을 정기적으로 순회방문 하면서 기독교의 복음을 전파했다.

제일 먼저 이 지역의 실정을 답사하며 무엇이 가장 시급한 일이며 무엇을 어떻게 도와야 할지 고민하며 기도하기 시작했다.

부산의 선교본부와 본국으로 보내는 보고서를 통해 통영의 실정을 알리고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선교활동의 필요함을 호소하며 도움을 요청했다.

무어 선교사의 눈에 비친 통영의 시급한 모습은 다름 아닌 어린이들의 영양과 건강 상태 그리고 교육의 필요성과 홀대 받는 여성들에 대한 생활대책이었다.

이러한 그녀의 끈질긴 노력은 부산진에 있는 호주장로교 부산선교부의 마음을 움직이기 시작했고 이렇게 해서 모인 호주선교부 특별 위원회는 지역적 특성과 선교적 필요에 따라 통영과 거창에 선교부를 설치하기로 가결하였다.

당시 통영은 작은 어촌에 불과 했지만 주변에 많은 섬들이 있고 섬 지역 사람들의 열악한 환경과 기독교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선교부의 설치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러한 결과를 이끌어 내기까지는 1894년부터 약 9년간 통영을 방문 하면서 꾸준히 노력한 무어 선교사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마침내 1913년 현 문화동 269번지 일대 약 1만2천여 평의 대지에 통영호주 선교부 건물이 들어서게 되었고 미혼의 독신이었던 무어 선교사를 돕기 위해 마산에 있던 왓슨(한국 이름 왕대선) 선교사 부부가 합류했다.

그 이전까지 통영지역은 부산 선교부 소속 있었는데 통영 선교부가 설립되면서 무어와 왓슨은 이 지역선교의 개척 선교사가 되었고 이는 곧 통영근대화의 주춧돌이 되기도 했다.

이곳에서 통영 최초의 근대식 교육과 의료 활동이 이뤄졌고 통영의 수많은 인재를 길러내는 산실이 됐다.

무어 선교사는 어린이와 여성교육에 전념하며 주간학교와 야간학교를 개설하고 나중에는 왓슨 선교사와 함께 통영 최초의 유치원을 설립했다. 그들이 설립한 진명유치원은 훗날 이 지역의 수많은 예술가와 인재를 길러낼 만큼 인기가 매우 높아서 두 번째의 유치원을 통영 서쪽에 설립했으나 일제에 의해 유치원 건물이 부적당 하다는 이유로 1931년 강제 폐쇄 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그녀는 1919년 은퇴하기 까지 25년간 통영에서 젊음을 바쳐 특히 외롭고 소외된 내륙지역과 섬 지역을 순회하며 사람들을 위로하고 희망을 불어 넣었다. 왓슨 선교사와 함께 이들은 통영과 인접한 거제도, 삼천포, 남해, 사량도, 욕지도 등을 순회하며 역동적인 활동을 펼쳤다.

1년 뒤인 1914년 통영 최초의 의사인 테일러 선교사 부부가 부임 하면서 섬 지역을 방문하기 위해 마련한 배의 이름을 '꿈의 배(Dream Boat)' 라 짓고 십자가가 그려진 큰 깃발을 배에 달고 다닐 만큼 이들의 눈에 비친 조선과 조선인에게는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이 절실했던 것이다.
왓슨 선교사는 거제도 지세포리를 순회할 때 만난 박동환, 이명순 부부를 전도하여 지세포 교회를 설립하기도 했다.

당시 견내량은 다리가 없던 시절이라 통영에서 배를 타고 거제면까지 왕래했다. 그때 마다 그는 늘 뭔가를 배에 싣고 갔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요강과 작은 간이침대였다.(현. 지세포 교회 이주묵 장로 증언) 이는 당시 우리들의 생활환경이 얼마나 열악했는지를 보여준다.

1919년 무어 선교사가 본국으로 떠난 이후부터 왓슨 선교사 부부는 그녀의 뒤를 이어 진명 야학교, 진명 강습소 등 교육기관을 차례로 설립하며 이 지역 교육의 발전을 주도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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