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사흘 프랑스에서 나흘> - 울산 남구 한수형

삶의 공간을 옮긴다는 것은 물리적인 변화만을 가져오지는 않는다.



공간은 시간을 품고 있고, 공간에 머무는 사람들과 모든 사물의 향기를 품고 있으며 그로 인해 화학적 반응까지 가져오는 매우 복잡하고도 예측 불가능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공간을 옮긴다는 것은 미지의 세계로 끝을 정하지 못한 탐험이며 그것은 낯선 행성으로 가는 것과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공간을 옮긴다고 해서 늘 해오던 일상이 끝나지는 않는다. 새로운 공간으로 옮긴다는 것으로, 모든 것이 새롭길 바라지만 공간을 달리한다고 본질이 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단란한 가족이 있다. 그 목적이 무엇이 되었건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가 보고자 했다.

도시와 아파트, 교통체증과 복잡함에서 벗어나 새소리를 들으며 소요할 수 있는 공간이 허락되는 곳, 그곳으로 모두가 옮겨 간다면 삶이 얼마나 평화로울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며 아이들 셋과 아내를 데리고 영국에서 프랑스로 건너간다.

도버해협을 지나. 세월이 제법 지나간 자칭 '모드족'인 필자(이자 주인공)는 이 모든 상황에 대해 소소하게 적어 내려간다. 일기라고 해도 맞겠고, 일상을 찍은 스냅사진이라고 해도 맞겠다.
너무 자잘하고 소소하게 나열하고 있는 일들이 많아 나는 이 책이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를 한참 읽고도 파악하지 못했다.

이토록 자잘할 수 있을까 싶은 낱말들이 어지럽고 돌아다녔고, 그 별 것 아닌 일상들은 이 책을 읽는 나로 하여금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건데?!'라는 생각만 유발시켰다.

나는 너무도 심각하게 이 책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일까. 나는 내 일상에 대하여 무엇을 그리도 거창하게 생각하고 싶었던 것일까.

잔잔한, 별 걱정 없이, 별문제 없이 살아가고 있던 일상이 너무도 지겨웠을까.

나는 4번째 챕터 즈음 읽어갈 때, 무어 씨의 가정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본 누군가의 일상은 이리도 유쾌했다.

찰리 채플린의 이 문장이 문득 생각났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 찰리 채플린

때로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지금의 이 고생과 힘듦이 모두 끝났으면 좋겠다고. 아마도 모두가 하는 생각일 것이다.

어떤 삶의 수고로움 앞에 우리는 곧잘 불행을 갖다 붙이고, 불행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 모든 삶이 바뀌길 바란다. 언젠가 그런 생각을 하다 하다 지겨워(그런 생각들로만 무장되어 있는 내가 지겨워서) 그 다음은 어떻게 될까를 상상해본 적이 있었다.

그 다음은… 그 다음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불행에서 벗어난 순간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순간이어야만 했다.

그 불행들을 다 없애기 위해서는 돈이 얼마간 있어야 하고, 집이 안정되어야 하고, 친구들이 나를 좋아해주어야 하고, 여행도 마음대로 다녀야 하고, 아무것도 거침이 없어야 했다.

그런데 나는 언젠가 휴일의 낮 12시까지 늦잠을 자다 혼자 깬 후 깨달은 것이 있었다. '늦잠이 의미있으려면, 등짝을 때리며 깨우는 엄마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학창 시절의 늦잠과 그 늦잠 때문에 벌어지는 엄마와의 사투(!)에서 벗어나는 것이 어른이 된 것인 줄 알고 얼마나 기뻐했는데! 혼자 살게 되었던 어느 날 보란 듯이 늦잠을 잘 것이라며! 엄마도 이제 없다며! 그런데 신나게 자다가 문득 아무도 깨우는 이 없이 일어났을 때의 그 알 수 없는 허탈감이란. 그리하여 알았다.

일상은 무조건 자잘해야 하고. 작든 크든 투쟁이 필요하며, 언제나 수고로워야 한다는 것을.

일상의 수고로움과 고됨, 그리고 그 수많은 사건과 사고(고양이가 새로 산 소파를 스크레처로 쓰게 되던지, 비가 오고 강풍이 불어 집안 가재도구가 날아가버린다든지, 폭설로 3일 동안 발이 묶여 집에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든지.)가 나를 보여주는, 나의 행복의 일부가 될 수밖에 없음을 말이다. 불행은, 내가 불행이라고 명명하는 순간에만 그렇게 될 뿐임을 깨닫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식구들이동물들과함께집안에서지내는것자체가스트레스다. 그렇게 지내가 보면 집단 내에서, 혹은 개개의 구성원들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는 건 사실상 불가피하다.

특히 그 집단이 사람의 진이 빠지도록 일을 저지르는 어린 고양이 세 마리, 성적으로 타락한 스패니얼,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개, 열 살 미만의 남자아이 세 명, 캐스 키드슨과 쿠션에 환장한 여자, 그리고 사나운 성깔과 강박증 기질이 있는 모드족 남자로 구성되어 있다면…, 무엇이든 하나는 포기해야 한다.- 이안 무어, <영국에서 사흘, 프랑스에서 나흘> p.163 중에서.

(덧. 이 문단만 떼어놓고 보니 다 읽지 않고는 알 수 없는 해학과 풍자를 그대로 느끼기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 새침한 문장이자 즐거운 문장이다. 집안 구성원을 표현하는 필자의 애정이 느껴졌다.
나는 이 문단에서 정말 웃음이 터졌다. 특히, 쿠션에 환장한 여자와 모드족 남자라는 표현에서 말이다. 이 얼마나 현실감 있는(!) 표현이던지.)

그리하여, 나는 무어 씨의 이 이야기들을 정겹게 그리고 '강 건너 불구경하듯' 재밌게 바라볼 수 있었다. 그것은 나의 일상이기도 하며, 당신의 일상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일상에서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일상에서 벗어날 수 없음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우리는 언제나 이렇듯 더없이 즐거운 희극 속에서 살고 있을 테니 말이다. 스스로의 삶이 무거워져 있었던 것일까.

때로 즐겁게 살고 있다 생각했던 내게 적지 않은 무게가 가로막혀 있었던지 이 책이 주는 시간은 그야말로 원래는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던 시간이었다.

공간과 책이 시간을 창조하는 것일까, 라는 거창한 생각마저 들게 할 정도로. 당신의 일상이 얼마나 유쾌할 수 있는지, 우리의 삶이 얼마나 자잘할 수 있는지, 얼마나 더 자잘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책이었다.

삶의 무게가 느껴지는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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